헤세의 <싯다르타> 중에서 - 2
이튿날 고빈다는 동방으로 떠나기에 앞서 이렇게 물었다.
“싯다르타, 떠나기 전에 한마디 물을 말이 있소. 나에게 무슨 가르쳐 줄 말이 없겠소?
당신이 신봉하고 당신을 지키며 인도하는 무슨 신앙과 지혜를 갖고 있지 않소?“
싯다르타는 대답했다.
“그건 잘 모르고 하는 소리요. 나는 청년시절 산에서 고행할 때 이미
스승들의 모든 가르침에 의혹을 느끼고 멀리 떠나지 않았소?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생각엔 변함이 없소 그러나 그 후에도 나는 많은 스승을 모셔왔소.
아름다운 유녀도 오랫동안 내 스승이었고, 돈 많은 상인도, 몇몇 도박꾼들도 다 내 스승이었소.
물론 순례하는 불타의 제자 한 분도 나의 스승이었구요.
그는 순례하는 도중에 내가 숲에서 자고 있는 것을 보자 내 옆에 앉아 나를 보살펴 주었소.
그에게서도 많은 것을 배웠소. 그에게 새삼 감사드리오.
그러나 나는 누구에게서보다도 이 강에서 많은 것을 배웠소.
그리고 선배 뱃사공 바스데바에게서도 많이 배웠지요. 그는 실로 순박한 분이었소.
그는 사색가는 아니지만 고마타와 같이 사물의 필연적인 관계를 잘 알고 있었소.
그는 한 사람의 인격 완성자요, 성자였소..“
“오, 싯다르타! 당신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남을 곧잘 비웃는구려.
그러나 나는 당신을 믿고 있소. 그리고 당신이 어떤 스승도 따르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비록 무슨 교훈 같은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당신의 생활을 인도하는 사상과 지혜는 갖고 있을 거요.
그걸 말해주면 매우 고맙겠소.“
“하긴 그렇소. 물론 나는 사상도 가져보고 지혜도 가져 보았소.
나는 때때로 한 시간 동안, 아니 하루종일 누구나 생명을 느끼듯 이 마음속의 지혜를 느낀 적이 있었소.
그것은 여러 가지 사상으로서, 당신에게 전할 수는 없소.
고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찾아낸 사상이오. 요컨대 지혜는 남에게 전할 수 없는 법이오.
현자들이 전하려는 지혜란 언제나 무지와 같은 거요.“
“당신은 또 사람을 희롱하는구려.”
고빈다는 말했다.
“희롱하는 게 아니오. 나는 다만 내가 찾은 지혜에 대하여 말하는 거요.
지식은 남에게 전할 수는 있지만 지혜는 전할 수 없소.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지혜를 찾아낼 수 있소.
또 지혜롭게 살 수도 있고 지혜로 기적을 행할 수도 있소.
그러나 지혜를 말해주거나 가르쳐줄 수는 없소. 이것은 내가 이미 청년시절에도 가끔 느꼈던 것으로서,
여러 스승들의 곁을 떠난 것도 그 때문이었소. 나는 하나의 사상을 발견했소.
고빈다! 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또 사람을 희롱하는 건방진 소리라고 할는지 모르지만,
모든 진리는, 그 반대도 진리요. 이건 내가 알고 있는 가장 휼륭한 사상이오.
진리는 일방적인 경우에만 입밖에 내어 말로 표현할 수 있소.
따라서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모든 진리란 일방적인 거요.
즉 모든 것은 일방적이오. 반쪽이오. 그것은 전체가 못되므로 완벽할 수 없고 단일화할 수 없소.
그러므로 성자 고마타는 세계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열반과 윤회, 진리와 미망, 해탈과 번뇌를 나눠서 설명할 수밖에 없었소.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요. 남에게 가르치려면 그렇게 하는 도리밖에 없지요.
그러나 세계 자체, 우리 주위에 있거나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일방적인 것이 아니오.
누구나, 그리고 무슨 일이나 윤회 속에만 매여 있거나 열반 안에만 있을 수는 없소.
어떤 사람도 성자가 아니면 죄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소.
그렇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시간이라는 것이 있다[實在]고 생각하는,
일종의 미망에 빠져있기 때문이오. 고빈다, 시간은 있는 것이 아니오. 나는 가끔 그것을 체험했소.
시간이 있지 않다면 현실과 영원, 고뇌와 행복, 선과 악 사이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간격도
역시 미망일 거요.“
“어찌하여 그렇소?”
고빈다는 불안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내 말을 잘 들으시오. 나와 같은 죄인도 언젠가는 한 번 梵이 되고,
극락세계에 들어가 부처가 될 것이라고 생각되지요?
그러나 이 ‘언젠가는 한번’이란 곧 미망이 아니겠소? 그것은 한낱 이유에 불과한 말이오.
그렇다면 죄인은 부처가 되어가는 도중에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흔히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죄인 속에 부처가 있는 거요.
미래는 거기 내포되어 있소. 지금 이 순간에 이미 미래의 부처는 있는 거요.
미래는 거기 내포되어 있소. 그러므로 죄인은 당신과 모든 사람들 속에 내포되어 있는
미래의 부처를 존경해야 하는 거요.
고빈다, 세계는 결코 불완전한 것이 아니오. 세계는 순간마다 완전한 거요.
모든 죄는 이미 그 속에 속죄의 씨를 품고 있소. 모든 어린애 속에 이미 백발노인이 숨어 있소.
그리고 모든 젖먹이 속에 이미 죽음이 깃들여 있고, 모든 죽음 속에 영생이 깃들여 있소.
누구나 남이 걸어가는 길을 옆에서 평가할 수는 없소.
도둑이나 노름꾼 속에도 부처가 있고, 바라문 속에도 도둑이 있는 법이오.
깊은 명상에 잠겨 시간을 초월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일하게 볼 수 있을때
비로소 모든 것이 범과 일체가 되오. 그러므로 현재 있는 모든 것이 나에게는 선으로 보이오.
죽음도 삶으로 보이고 죄악도 신선하게 보이며 지혜로운 것도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오.
또 모든 것은 그렇게 되어야 하지요. 모든 것이 나의 동의와 이해를 요구하고 있소.
나에게는 모든 것이 선이오. 나를 해치는 것은 하나도 없소. 나는 육체와 정신으로 이것을 체험했소.
나에게는 죄악이 필요했소. 쾌락, 탐욕, 허영, 그리고 가장 고약한 자포자기까지도 필요했소.
반항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내가 희망하고 꿈꾸는 이상세계와 현실을 비교하는 어리석은 짓을 그만 두고,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사랑하고 그것을 기꺼이 따라가기 위해 나에게는 그런 모든 죄악이 필요했소.
아! 고빈다, 이것은 내가 도달한 사상의 일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