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한 2008. 5. 9. 13:28

 


사고는 두뇌 속에 기억으로 저장된 경험과 지식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반응은 따라서 언제나 과거로부터 움직임을 시작한다. 그렇다면 과거 속에 안전이 있을까? 이성과 논리 , 그리고 찾기 위한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라. 본질적으로 과거인 사고의 행동이 과연 안전을 줄 수 있을까? 다시 한번 그 연쇄 관계를 생각해 보라.

사고는 자신이 만들어낸 것에서 안전을 찾는데 그 안전은 과거에서 연유한 것이다. 사고는 비록 미래를 투영한다 해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나는 신성을 성취하고 싶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고의 운동은 본질적으로 과거에서 연유한 것이다. 사고는 과거 속에 안전이 존재하지 않음을 인식하고 하나의 개념 즉 이상적인 마음의 상태를 투영시키고 그러한 미래의 희망 속에서 안전을 찾는다.

인간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서 사고와, 사고가 본질적이고 성스럽다거나 그렇지 않은 것 등으로 결합시켜 놓은 것들에 의존한다. 누군가가 다가와서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자, 보시오. 그 모든 것은 과거의 운동이란 말이오.” 그러면 그 사람과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던 다른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론 비록 과거로부터 나온다고 할지라도 사고에 집착한다는 것이 뭐가 잘못 됐는가?” 그러자 앞서의 그 사람은 이를 인정하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고에 매달릴 것이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과거 속에서 살고 과거에 매달릴 때 그것은 살 능력을 상실한 것이며, 따라서 진리를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어떤 도달점에 이르게 된 것 같다. “그리하여 나는 그와 같은 것들 속에 안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한 것들이 회의적일 때 공포가 존재함을 보고 논리적으로 인식한다.”

한편 우리가 어떤 것을 본다고 말할 때 ‘보다’라는 단어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다만 논리적인 이해나 언어상의 이해, 혹은 선조적인 이해인가?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서 사고의 운동 전반을 깨뜨릴 수 있을 정도로 심오한 이해인가? “나는 당신이 말하는 내용을 이해한다.”고 말할 때 ‘이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영어로 된 말 몇 마디를 알아 들었다는 뜻인가? 단어를 이해하고 단어의 뜻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의 극히 피상적인 수준의 이해인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해한다.”고 이야기 할 때, 실제로 사고가 무엇인가에 관한 진리를 보거나 관찰한다는 뜻인가?

당신은 사고와 사고가 만들어낸 모든 것이 결코 안전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실제적으로 느끼고 맛보고 관찰해야 한다. 그것의 진실을 보는 것이 곧 지성이다. 그러한 지성은 이성이나 논리가 아니며, 또한 신중한 변증법적 설명도 아니다. 결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사고의 설명이 아닌 것이다.

사고는 그러한 지성이 될 수 없다. 진리에 대한 인식이 지성이다. 그리고 그러한 지성 속에 안전이 존재한다. 그 지성은 당신의 것도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또한 아무런 조건도 부여 받지 않는다. 그 모든 것들은 이제 끝난 것이다. 우리는 그리하여 사고가 바로 자신의 운동 속에서 조건을 창조해 낸다는 사실과 그러한 운동에 대한 이해야말로 지성이라는 점을 보아왔다. 그 지성에는 안정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로부터 행동이 나온다.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이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예컨대 공포, 슬픔, 죽음, 명상 등등. 하지만 그 본질은 하나이다. 사고는 과거로부터 시작하는 운동이며, 따라서 시간적이고 측정이 가능한 것이다. 측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결코 측정이 불가능한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

진리는 오직 마음이 사고가 만들어 낸 모든 것을 사실적으로 볼 때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관찰 과정이 지성이다. 그러한 지성이 존재할 때, 모든 것은 끝이 난다. 그렇게 되면 비록 당신이 이 세상 속에서 무언가를 하기 위해 노력한다. 해도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완전한 아웃사이더가 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