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識]/위빠사나(명상)

[수완스님]우리는 왜 질문을 할까?

그러한 2008. 7. 18. 14:11

 

Q 수행자가 죽으면 무엇이 남을까?

A 오랜 세월 믿음과 계행으로 욕망에서 벗어나는 통찰 지혜를 닦은 오온이 죽을 때는, 몸은 비록 변하여 사라져도 그동안 수행한 마음의 힘은 남는다. 사랑하는 마음, 살리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 치우침 없는 마음 등 긍정적인 마음의 씨앗도 남아 있고.


Q 몸으로 삿된 행위를 저지르지 않고 거친 말을 삼가며 악의를 품지 않아서 착하게 살면 수행자일까?

A 그렇지 않다. 그와 같다면 어리고 연약하여 누워 있는 아기도 수행자라 할 수 있다. 태어나자마자 아는 마음은 죽는 순간까지 이어지지만, 갓난아기에게도 감각적인 욕망이나 노여움이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 성향(anusaya)은 있다. 갓난애가 모유를 먹을 때 느끼는 즐거움에는 ‘중생’이라는 사견과 ‘자아’라는 의식이 숨어 있다. 그러나 수행자는 낱낱이 꿰뚫어봐서 누가 즐거움을 느끼는지 안다. 이렇게 이미 지니고 있는 사념(邪念)과 불건전한 습성을 알고 그것이 생긴 원인을 알아서, 그걸 남김없이 없애야 한다.

  그 길이 팔정도(八正道: 바른 견해, 바른 의도,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업, 바른 노력,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삼매)인데, 당신에게 바른 길을 가려는 의지가 없다면 마음이 착하더라도 공허할 따름이다. 그러나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해탈은 다가가려는 이 가까이에 있으므로, 당신이 팔정도를 닦기만 하면 있는 그대로 보여서 해탈(vimutti)하게 된다.


Q 지금 이 순간 마음을 챙길 때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가 어떻게 드러나나?

A 언제나 노력(正精進)으로 마음 챙기고(正念) 집중(正定)하여 오온의 생멸 현상을 분명히 보아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을 알게 되면, 삼독심이 정화되어서 바른 견해(正見)와 바른 의도(正思惟)가 생긴다. 그러면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업(正命)이 이어져서 상대적인 행복이 절대적인 행복으로 바뀐다.

  우리가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탐욕을 일으키거나 추한 모습을 보고 혐오를 느낀다면, 시각의 바다에서 소용돌이에 휘말려 난파되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아름답거나 추한 모습을 보는 순간,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면 애착에서 떠나게 된다. 삶의 괴로움은 마음에 걸림이 없으면서(戒) 마음이 산만하지 않고(定) 어리석지 않아(慧) 치우침 없이 청정하게 살 때 제대로 보이는데, 그리 살려고 삶을 무위(無爲)로 이끄는 길이 팔정도(八正道)다. 그 길을 닦으면 탐·진·치가 소멸된다. 그때 열반(nibbāna)이 실현된다. 열반은 완전히 자연스런 상태이다.


Q 수행자가 청정하게 사는 이유는?

A 진리를 알기 위해서, 즉 18계(18界: 6根·6境·6識)가 괴로움이라는 걸 분명히 알기 위해서이다. 그러기 위해 붓다께서는 호흡관(呼吸觀 ānāpānasati)을 권하셨다. 호흡에서 무상이 관찰되고 욕망이 버려질 때 번뇌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호흡에서 오온을 관찰하다 보면 자연스레 18계 관찰로 이어진다.


Q 우리는 왜 질문을 할까?

A ① 알고 싶은 욕망과 함께 어리석어서, 아니면 이미 지니고 있는 견해에 대한 애착과 상대에 대한 악의가 어우러져서, 그게 아니면 상대를 업신여기는 마음이 순간 생겨서, 그것도 아니면 상대가 올바르게 답변하면 다행이지만 그러지 않을 경우엔 아는 척하려고, 그리고 상대방을 참으로 깨우쳐주려는 연민이 우러나서 한다.

  질문을 할 때는 질문하고 싶은 욕망의 배후를 알아차려서 간절한 마음으로 질문하라. 그러면 응답자는 질문자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졌을 땐 왼쪽으로 밀고 왼쪽으로 기울어졌을 땐 오른쪽으로 밀어서 견해가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잡아준다. 그리고 응답자는 자신이 실천해야 할 덕목을 충고할 때도 있으므로 듣는 이가 잘 새겨들어야 한다.

  ② 상대에게 묻기 전에 자신에게 한번 끊임없이 물어보라. 묻는 이는 누구이고 해답을 찾는 이는 누구인가? 의문을 통해 의문이 풀린다. 의심스런 마음이 어떻게 일어나서 어떻게 사라지는지 그 자체를 온몸으로 의심해서 무의식의 밑바닥에 있는 생사(生死)의 분별까지 싹둑 잘라내면, 무언(無言)이 말해줄 것이다. 당신이 왜 수행을 하는지 그 목표를 의심할 땐 그걸 알 수 없다. 그러다가 주의(注意)를 유지해서 그 의혹이 걷히는 순간, 당신은 알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