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識]/위빠사나(명상)

‘완전한 마음 챙김’에 대한 붓다의 말씀

그러한 2009. 9. 5. 13:56

 

‘완전한 마음 챙김’에 대한 붓다의 말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붓다(Buddha)께서 쿠루족의 마을인 깜마삿담마에 머무셨다. 거기에서 붓다께서는 비구들을 “오, 비구(bhikhu)들이여!” 라고 부르셨다. 그러자 비구들은 “부처님이시여!”라고 대답했다. 그분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중생의 마음의 정화를 위한, 슬픔과 설움을 넘어서기 위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의 소멸을 위한, 성스러운 진리를 알기 위한, 그리고 열반을 실현시키는 오직 한 길은 네 가지 대상을 완전하게 챙기는 것이니라. 여기에서 네 가지란 무엇인가? 그대는 몸들에서 몸을 몸으로, 느낌들에서 느낌을 느낌으로, 마음들에서 마음을 마음으로, 법들에서 법을 법으로 관찰하며 지낸다. 이렇게 온힘을 기울여서 쉬지 않고 대상을 챙기다 보면 그 본성이 드러나서 그걸 분명히 알게 되는 순간, 세상(오온)에 대한 탐심(貪心)과 진심(嗔心)을 제어하여 놓아버리게 되니라.


몸을 있는 그대로 보기



호흡 관찰(呼吸觀 ānāpānasati)



그러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몸들에서 몸을 몸으로 관찰하며 지낼까?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승은 숲속 나무 아래 한적한 곳에 가서 결가부좌로 상체를 똑바로 세운 후, 깨어 있는 마음으로 호흡에 밀착하여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을 알아차린다. 마치 숙련된 도공이 물레를 천천히 돌리면서 ‘천천히 도네’라고 알아차리고 빨리 돌리면서 ‘빨리 도네’라고 알아차리듯이, 그대는




들숨이 길면 ‘들숨이 길다’라고 알아차리고,

날숨이 길면 ‘날숨이 길다’라고 알아차린다.

들숨이 짧으면 ‘들숨이 짧다’라고 알아차리고,

날숨이 짧으면 ‘날숨이 짧다’라고 알아차린다.

온몸의 느낌을 체험하며 숨을 들이쉬고

온몸의 느낌을 체험하며 숨을 내쉰다. 이때도 수행에 전념한다.

그래서 알아차림이 성성하면, 몸의 형성 작용(身行)이 고요해지는 걸 알며 숨을 들이쉬고

몸의 형성 작용이 고요해지는 걸 알며 숨을 내쉰다. 이때도 수행에 전념한다.


희열이 충만하면, 그걸 몸소 느끼며 숨을 들이쉬고,

그걸 몸소 느끼며 숨을 내쉰다. 이때도 수행에 전념한다.

행복감이 충만하면, 그걸 몸소 느끼며 숨을 들이쉬고,

그걸 몸소 느끼며 숨을 내쉰다. 이때도 수행에 전념한다.

마음의 형성 작용(心行)을 느낌으로 알며 숨을 들이쉬고

마음의 형성 작용을 느낌으로 알며 숨을 내쉰다. 이때도 수행에 전념한다.

그래서 알아차림이 성성하면, 심행(心行)이 고요해지는 걸 느낌으로 알며 숨을 들이쉬고

심행이 고요해지는 걸 느낌으로 알며 숨을 내쉰다. 이때도 수행에 전념한다.


이렇게 심리 상태를 일일이 알며 숨을 들이쉬고,

심리 상태를 일일이 알며 숨을 내쉰다. 이때도 수행에 전념한다.

법열(法悅)을 느낌으로 알며 숨을 들이쉬고,

법열을 느낌으로 알며 숨을 내쉰다. 이때도 수행에 전념한다.

마음의 고요를 느낌으로 알며 숨을 들이쉬고,

마음의 고요를 느낌으로 알며 숨을 내쉰다. 이때도 수행에 전념한다.

마음의 해탈을 느낌으로 알며 숨을 들이쉬고,

마음의 해탈을 느낌으로 알며 숨을 내쉰다. 이때도 수행에 전념한다.


무상(無常)을 있는 그대로 보며 숨을 들이쉬고,

무상을 있는 그대로 보며 숨을 내쉰다. 이때도 수행에 전념한다.

탐심이 사라지는 걸 있는 그대로 보며 숨을 들이쉬고,

탐심이 사라지는 걸 있는 그대로 보며 숨을 내쉰다. 이때도 수행에 전념한다.

다 스러지는 걸 있는 그대로 보며 숨을 들이쉬고,

다 스러지는 걸 있는 그대로 보며 숨을 내쉰다. 이때도 수행에 전념한다.

완전히 벗어났음을 비추어보며 숨을 들이쉬고,

완전히 벗어났음을 비추어보며 숨을 내쉰다. 이때도 수행에 전념한다.


이와 같이 그대가 안으로 밖으로, 또는 안팎으로 호흡을 보이는 대로 관찰하면, 집중이 깊어질수록 몸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과 그 원인을 알게 되고 사라지는 현상과 그 원인을 알게 되며, 생멸하는 현상과 그 원인을 분명히 알게 된다. 또한 그대는 호흡을 챙길수록 몸은 단지 순수한 앎과 마음 챙김을 키우기 위한 매체일 뿐 그 속에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지혜가 차오름에 따라 갈애와 사견이 사라져서, 이 세상 어느 것에도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지낸다.


몸의 움직임에 대한 분명한 앎


그러면서 비구들이여, 비구가 걷고 있을 때는 ‘걷고 있음’을, 서 있을 때는 ‘서 있음’을, 앉아 있을 때는 ‘앉아 있음’을, 누워 있을 때는 ‘누워 있음’을 분명히 안다. 또한 앞으로 나가거나 뒤돌아올 때 분명히 알고 앞을 보거나 뒤돌아볼 때도 분명히 알며, 팔다리를 구부리거나 펼 때도 분명히 알고 가사를 입거나 바루를 챙길 때도 분명히 안다. 먹거나 마실 때와 그걸 맛보고 소화시킬 때도 분명히 알고,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히 안다. 그리고 잠들고 깨어나는 순간과 말하거나 침묵할 때도 분명히 안다.

이와 같이 그대가 안으로 밖으로, 또는 안팎으로 몸의 움직임을 보이는 대로 관찰하면, 집중이 깊어질수록 몸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과 그 원인을 알게 되고 사라지는 현상과 그 원인을 알게 되며, 생멸하는 현상과 그 원인을 분명히 알게 된다. 또한 그대는 몸의 움직임을 챙길수록 몸은 단지 순수한 앎과 마음 챙김을 키우기 위한 매체일 뿐 그 속에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지혜가 차오름에 따라 갈애와 사견이 사라져서, 이 세상 어느 것에도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지낸다.


몸의 더러움 관찰(不淨觀)


또 그대의 몸은 머리끝에서 발바닥까지 갖가지 불순물이 꽉 차서 피부로 에워싸여 있음을 샅샅이 관찰하여, ‘이 몸에 머리카락, 털, 손발톱, 치아, 피부, 살, 힘줄, 뼈, 골수, 콩팥, 심장, 간, 폐, 비장, 대장, 소장, 늑막, 위, 뇌수, 배설물, 담즙, 가래, 고름, 피, 땀, 지방, 눈물, 임파액, 침, 콧물, 관절액, 오줌 등이 있다’라고 낱낱이 안다. 그것은 마치 양쪽 끝에 구멍이 뚫린 자루 속에 보리, 쌀, 녹두, 콩, 참깨, 기장 등 갖가지 곡식이 가득 들어 있는 걸 눈 밝은 이가 열어보고는 ‘이건 보리, 이건 쌀, 이건 녹두, 이건 콩, 이건 참깨, 이건 기장’이라고 살피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그대가 안으로 밖으로, 또는 안팎으로 몸의 더러움을 보이는 대로 관찰하면, 집중이 깊어질수록 몸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과 그 원인을 알게 되고 사라지는 현상과 그 원인을 알게 되며, 생멸하는 현상과 그 원인을 분명히 알게 된다. 또한 그대는 몸의 더러움을 챙길수록 몸은 단지 순수한 앎과 마음 챙김을 키우기 위한 매체일 뿐 그 속에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지혜가 차오름에 따라 갈애와 사견이 사라져서, 이 세상 어느 것에도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지낸다.


사대 요소 관찰


또한 그대는 이 몸이 어떤 자세로 있든 4대(四大: 세상의 네 가지 근본 성분) 요소로 이루어져 있음을 관찰해서, ‘이 몸에는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안다. 마치 능숙한 백정이나 그의 제자가 소를 도살하여 부위별로 나누어놓고는 큰 길 네거리에서 소는 간 데 없이 오직 고깃덩어리만을 보여주는 것처럼, 그대는 이 몸도 어떤 자세로 있든 지(地)․수(水)․화(火)․풍(風)의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음을 관찰해서 안다.

이와 같이 그대가 안으로 밖으로, 또는 안팎으로 4대 요소를 보이는 대로 관찰하면, 집중이 깊어질수록 몸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과 그 원인을 알게 되고 사라지는 현상과 그 원인을 알게 되며, 생멸하는 현상과 그 원인을 분명히 알게 된다. 또한 그대는 4대 요소를 챙길수록 몸은 단지 순수한 앎과 마음 챙김을 키우기 위한 매체일 뿐 그 속에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지혜가 차오름에 따라 갈애와 사견이 사라져서, 이 세상 어느 것에도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지낸다.


몸의 속성 관찰(屍體觀)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하루 이틀, 또는 사흘이 지나면서 퉁퉁 부풀어오르고 푸르죽죽해지며 짓무르는 걸 보고서 그대의 몸을 비추어보아, ‘진실로 이 몸 역시 그와 같이 되어서 그런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라고 안다.

수행승은 묘지에 버려진 시체를 까마귀, 매, 독수리, 승냥이, 들개, 표범, 호랑이, 자칼이나 갖가지 벌레들이 뜯어 파먹는 걸 보고서 그대의 몸을 비추어보아, ‘진실로 이 몸 역시 그와 같이 되어서 그런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라고 안다.

그대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에서 피와 살점이 달라붙은 채 힘줄로 연결된 해골, 피는 묻어 있지만 살점은 붙어 있지 않고 힘줄로 연결된 해골, 피도 살점도 없이 힘줄로 연결된 해골, 그 뼈들의 연결이 풀려서 손뼈, 발뼈, 정강이뼈, 넓적다리뼈, 골반뼈, 등뼈, 갈비뼈, 팔뼈, 어깨뼈, 목뼈, 턱뼈, 이빨, 두개골 등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걸 보고서 그대의 몸을 비추어보아, ‘진실로 이 몸 역시 그와 같이 되어서 그런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라고 안다.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조개껍질처럼 백골로 변해 있음을 보고서, 온갖 풍상으로 뼈 무더기만 남아서 흩어져 있음을 보고서, 그리고 뼈마저 삭아 부서져 흙가루가 되어 있음을 보고서 그대의 몸을 비추어보아, ‘진실로 이 몸 역시 그와 같이 되어서 그런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라고 안다.

이와 같이 그대가 안으로 밖으로, 또는 안팎으로 몸의 속성을 보이는 대로 관찰하면, 집중이 깊어질수록 몸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과 그 원인을 알게 되고 사라지는 현상과 그 원인을 알게 되며, 생멸하는 현상과 그 원인을 분명히 알게 된다. 또한 그대는 몸의 속성을 챙길수록 몸은 단지 순수한 앎과 마음 챙김을 키우기 위한 매체일 뿐 그 속에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지혜가 차오름에 따라 갈애와 사견이 사라져서, 이 세상 어느 것에도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지낸다.


느낌을 있는 그대로 보기


동시에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느낌들에서 느낌을 느낌으로 관찰하며 지낼까?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승은 즐거울 때 ‘즐거운 느낌’을, 괴로울 때 ‘괴로운 느낌’을,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을 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으로 안다. 그는 세간에서 즐거울 때는 ‘세간에서 즐거운 느낌’을, 출세간에서 즐거울 때는 ‘출세간에서 즐거운 느낌’을 체험으로 안다. 또 세간에서 괴로울 때는 ‘세간에서 괴로운 느낌’을, 출세간에서 괴로울 때는 ‘출세간에서 괴로운 느낌’을 체험으로 안다. 또한 세간에서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을 때는 ‘세간에서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출세간에서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을 때는 ‘출세간에서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으로 안다.

이와 같이 그대가 안으로 밖으로, 또는 안팎으로 느낌을 보이는 대로 관찰하면, 집중이 깊어질수록 느낌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과 그 원인을 알게 되고 사라지는 현상과 그 원인을 알게 되며, 생멸하는 현상과 그 원인을 분명히 알게 된다. 또한 그대는 느낌을 챙길수록 느낌은 단지 순수한 앎과 마음 챙김을 키우기 위한 매체일 뿐 그 속에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지혜가 차오름에 따라 갈애와 사견이 사라져서, 이 세상 어느 것에도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지낸다.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기


그 순간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마음들에서 마음을 마음으로 관찰하며 지낼까?

그대는 탐심이 있으면 ‘탐심(貪心)이 있음’을, 탐심이 없으면 ‘탐심이 없음’을 알고, 진심(嗔心)이 있으면 ‘진심이 있음’을, 진심이 없으면 ‘진심이 없음’을 느낌으로 안다. 치심(癡心)이 있으면 ‘치심이 있음’을, 치심이 없으면 ‘치심이 없음’을 느낌으로 알고. 그는 마음이 위축되면 ‘마음이 위축됨’을, 마음이 산란하면 ‘마음이 산란함’을 느낌으로 안다. 또 마음이 수행으로 정화되면 ‘마음이 수행으로 정화됨’을, 마음이 수행으로 정화되지 않으면 ‘마음이 수행으로 정화되지 않음’을 느낌으로 안다. 완전히 닦여서 더 이상 위없는 마음(無上心)이면 ‘위없는 마음’임을, 덜 닦여서 아직 위없는 마음이 아니면 ‘위없는 마음이 아님’을 느낌으로 안다. 마음이 삼매에 들면 ‘마음이 삼매에 듦’을, 마음이 삼매에 들지 않으면 ‘마음이 삼매에 들지 않음’을 알고, 마음이 해탈되면 ‘마음이 해탈됨’을, 마음이 해탈되지 않으면 ‘마음이 해탈되지 않음’을 느낌으로 안다.

이와 같이 그대가 안으로 밖으로, 또는 안팎으로 마음을 보이는 대로 관찰하면, 집중이 깊어질수록 마음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과 그 원인을 알게 되고 사라지는 현상과 그 원인을 알게 되며, 생멸하는 현상과 그 원인을 분명히 알게 된다. 또한 그대는 마음을 챙길수록 마음은 단지 순수한 앎과 마음 챙김을 키우기 위한 매체일 뿐 그 속에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지혜가 차오름에 따라 갈애와 사견이 사라져서, 이 세상 어느 것에도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지낸다.


법을 있는 그대로 보기


그리고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법들에서 법을 법으로 관찰하며 지낼까?


오장애(五蓋 nīvarana) 관찰


그대는 비구는 법들에서 다섯 가지 장애 현상을 보이는 대로 관찰하며 지낸다.

감각적 욕망(kāmacchanda)이 그대에게 있으면 ‘감각적 욕망 있음’을, 감각적 욕망이 없으면 ‘감각적 욕망 없음’을 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면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미 일어난 감각적 욕망이 사라지면 어떻게 사라지는지, 그리고 사라진 감각적 욕망이 이후로 일어나지 않으면 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

악의(vyāpāda)가 그대에게 있으면 ‘악의 있음’을, 악의가 없으면 ‘악의 없음’을 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의가 일어나면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미 일어난 악의가 사라지면 어떻게 사라지는지, 그리고 사라진 악의가 이후로 일어나지 않으면 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

나태와 졸음(thina-middha)이 그대에게 있으면 ‘나태와 졸음 있음’을, 나태와 졸음이 없으면 ‘나태와 졸음 없음’을 안다. 그대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나태와 졸음이 일어나면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미 일어난 나태와 졸음이 사라지면 어떻게 사라지는지, 그리고 사라진 나태와 졸음이 이후로 일어나지 않으면 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

들뜸(uddhacca)과 회한(kukkucca)이 그대에게 있으면 ‘들뜸과 회한 있음’을, 들뜸과 회한이 없으면 ‘들뜸과 회한 없음’을 안다. 그대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들뜸과 회한이 일어나면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미 일어난 들뜸과 회한이 사라지면 어떻게 사라지는지, 그리고 사라진 들뜸과 회한이 이후로 일어나지 않으면 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

의혹(viccikicchā)이 그대에게 있으면 ‘의혹 있음’을, 의혹이 없으면 ‘의혹 없음’을 안다. 그대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의혹이 일어나면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미 일어난 의혹이 사라지면 어떻게 사라지는지, 그리고 사라진 의혹이 이후로 일어나지 않으면 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

이와 같이 그대가 안으로 밖으로, 또는 안팎으로 오장애 현상을 보이는 대로 관찰하면, 집중이 깊어질수록 법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과 그 원인을 알게 되고 사라지는 현상과 그 원인을 알게 되며, 생멸하는 현상과 그 원인을 분명히 알게 된다. 또한 그대는 오장애 현상을 챙길수록 법은 단지 순수한 앎과 마음 챙김을 키우기 위한 매체일 뿐 그 속에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지혜가 차오름에 따라 갈애와 사견이 사라져서, 이 세상 어느 것에도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지낸다.


오온(五蘊 pañcakkhandha) 관찰


늘 그대는 ‘나’로 착각해서 집착하는 다섯 가지 몸과 마음의 집합을 보이는 대로 관찰하며 지낸다.

그대는 이건 물질적 현상(色 rūpa)이고, 그건 이리 일어나서 저리 사라진다는 걸 안다. 이건 느낌(受 vedanā)이고, 그건 이리 일어나서 저리 사라진다는 걸 안다. 또 이건 인식(想 saññā)이고, 그건 이리 일어나서 저리 사라진다는 걸 안다. 또한 이건 형성 작용(行 saṅkhārā)이고, 그건 이리 일어나서 저리 사라진다는 걸 안다. 그리고 이건 의식(識 viññāna)이고, 그건 이리 일어나서 저리 사라진다는 걸 안다.

 이와 같이 그대가 안으로 밖으로, 또는 안팎으로 오온을 보이는 대로 관찰하면, 집중이 깊어질수록 법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과 그 원인을 알게 되고 사라지는 현상과 그 원인을 알게 되며, 생멸하는 현상과 그 원인을 분명히 알게 된다. 또한 그대는 오온을 챙길수록 법은 단지 순수한 앎과 마음 챙김을 키우기 위한 매체일 뿐 그 속에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지혜가 차오름에 따라 갈애와 사견이 사라져서, 이 세상 어느 것에도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지낸다.


여섯 감각의 장(六門)의 안팎 관찰


항상 그대는 여섯 감각의 장(場)의 안팎에서 현상을 보이는 대로 관찰하며 지낸다. 그러면 어떻게 감각 영역과 그 대상을 챙기며 지낼까?

비구는 눈(眼)과 보이는 형상(色)을 알고, 둘이 만나서 일어나는 결박의 번뇌(十結 saṁyojana)를 안다. 또한 귀(耳)와 소리(聲), 코(鼻)와 냄새(香), 혀(舌)와 맛(味), 몸(身)과 촉감(觸), 마음(意)과 마음의 대상인 법(法)을 알고 둘이 만나서 일어나는 결박의 번뇌(오온을 ‘나’로 착각하는 사견, 불․법․승 삼보에 대한 의심, 의례에 집착하는 습관, 감각적 탐착, 악의, 색계에 대한 집착, 무색계에 대한 집착, 아만, 들뜸, 근본 무명)를 안다.

그대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결박의 번뇌가 일어나면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미 일어난 결박의 번뇌가 사라지면 어떻게 사라지는지, 그리고 사라진 결박의 번뇌가 이후로 일어나지 않으면 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

이와 같이 그대가 안으로 밖으로, 또는 안팎으로 감각 영역에 나타난 현상을 보이는 대로 관찰하면, 집중이 깊어질수록 법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과 그 원인을 알게 되고 사라지는 현상과 그 원인을 알게 되며, 생멸하는 현상과 그 원인을 분명히 알게 된다. 또한 그대는 여섯 감각의 장의 안팎을 챙길수록 법은 단지 순수한 앎과 마음 챙김을 키우기 위한 매체일 뿐 그 속에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지혜가 차오름에 따라 갈애와 사견이 사라져서, 이 세상 어느 것에도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지낸다.


칠각지(七覺支: bojjhanga) 관찰


언제나 그대는 도․과에 이르는 법들에서 일곱 가지 깨침의 요소를 보이는 대로 관찰하며 지낸다.

1. 그대 안에 마음 챙김(念覺 sati)이라는 깨침의 요소가 있으면, ‘마음 챙김이라는 깨침의 요소 있음’을, 마음 챙김이라는 깨침의 요소가 없으면 ‘마음 챙김이라는 깨침의 요소 없음’을 안다. 그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마음 챙김이라는 깨침의 요소가 일어나면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미 일어난 마음 챙김이라는 깨침의 요소는 어떻게 길들여서 수행을 완성할 것인지를 안다.

2. 법의 탐구(擇法覺 dhamma-vicaya)․노력(精進覺 viriya)․희열(喜覺 piti)․고요함(輕快安覺 passadhi)․삼매(定覺 samādhi)평등심(平等覺 upekkhā)이라는 깨침의 요소가 있으면 ‘법의 탐구노력희열고요함삼매평등심이라는 깨침의 요소 있음’을, 법의 탐구노력희열고요함삼매평등심이라는 깨침의 요소가 없으면 ‘법의 탐구노력희열고요함삼매평등심이라는 깨침의 요소 없음’을 안다. 그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법의 탐구노력희열고요함삼매평등심이라는 깨침의 요소가 일어나면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미 일어난 법의 탐구노력희열고요함삼매평등심이라는 깨침의 요소는 어떻게 길들여서 수행을 완성할 것인지를 안다.

이와 같이 그대가 안으로 밖으로, 또는 안팎으로 칠각지 현상을 보이는 대로 관찰하면, 집중이 깊어질수록 법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과 그 원인을 알게 되고 사라지는 현상과 그 원인을 알게 되며, 생멸하는 현상과 그 원인을 분명히 알게 된다. 또한 그대는 칠각지 현상을 챙길수록 법은 단지 순수한 앎과 마음 챙김을 키우기 위한 매체일 뿐 그 속에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지혜가 차오름에 따라 갈애와 사견이 사라져서, 이 세상 어느 것에도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지낸다.

3.

사성제(四聖諦 aria-sacca) 관찰


더불어 비구들이여, 비구는 법들에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보이는 대로 관찰하며 지낸다. 그대는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알고, ‘괴로움의 원인’을 있는 그대로 안다. ‘괴로움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있는 그대로 안다.


비구들이여, 괴로움(dukkha-sacca)이란 무엇인가?

태어남은 괴로움이다. 늙음도 병듦도 죽음도 괴로움이고, 슬픔과 설움, 정신적・육체적 고통과 절망도 괴로움이고, 싫은 걸 만나거나 좋은 것과 헤어짐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것 또한 괴로움이다. 요컨대 오온에 대한 집착이 다 괴로움이다. 

태어남이란 무엇인가? 어떤 부류에 속하든 중생의 태어남, 나옴, 생김, 오온의 나타남, 감각의 장의 안팎 섭수 등을 태어남이라 한다.

늙음이란 무엇인가? 어떤 부류에 속하든 중생이 나이가 들어 노쇠해서 치아는 약해지고 머리는 희어지고 피부는 주름살지며, 감각의 장이 노화되어 제 역할을 하지 못해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걸 늙음이라 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어떤 부류에 속하든 중생이 흩어져 부서지며 사라져서는 나타나지 않음, 수명이 다함, 오온의 해체, 생명력이 없음을 죽음이라 한다.

슬픔이란 무엇인가? 이런저런 잃음이나 마주치는 불행으로 인해 슬퍼서 슬픔에 잠긴 마음과 내면의 근심 걱정 등을 슬픔이라 한다.

설움이란 무엇인가? 이런저런 잃음이나 마주치는 불행으로 인한 한탄과 비탄, 비통해서 애도하는 마음을 설움이라 한다.

정신적 고통이란 무엇인가? 정신적인 불편함과 불쾌감, 정신적 접촉에 의해 생기는 불만족 등을 정신적 고통이라 한다.

육체적 고통이란 무엇인가? 육체적인 불편함과 불쾌감, 육체적 접촉에 의해 생기는 불만족 등을 육체적 고통이라 한다.

절망이란 무엇인가? 이런저런 잃음이나 마주치는 불행으로 인한 실망과 자포자기해서 무기력한 상태를 절망이라 한다.

싫은 걸 만나는 괴로움이란 무엇인가? 색・성・향・미・촉・법의 체험이 바람직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아서 괴로운데도 불구하고 체험하게 되고, 만나기만 하면 손해를 입히며 악의로 구속하려는 이들과 한데 어울리면서도 화해하지 못하는 걸 ‘원증회고(怨憎會苦)’라 한다.

좋은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이란 무엇인가? 색・성・향・미・촉・법의 체험이 바람직하고 마음에 들어서 즐거운데도 불구하고 체험하지 못하게 되고, 만날 때마다 도와주며 호의로 구속하지 않으려는 부모, 형제자매, 친구, 동료들과 떨어진 채 다시 결합하지 못하는 걸 ‘애별리고(愛別離苦)’라 한다.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란 무엇인가? 태어나는 중생은 이렇게 소망한다. ‘오, 태어나지 않았으면! 다시는 태어나지 않길!’ 또 늙고 병들어서 죽어가는 이는, 슬퍼서 서럽고 정신적・육체적으로 괴로워서 절망하며 이렇게 소망한다. ‘오, 이런 현상이 제발 일어나지 않기를! 내게 다시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소망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걸 ‘구불득고(求不得苦)’라 한다.

‘나’로 여기는 다섯 가지 몸과 마음의 집합의 괴로움이란 무엇인가? ‘나’로 착각해서 집착하는 물질의 집합, 느낌의 집합, 인식의 집합, 형성 작용의 집합, 의식의 집합 그 자체가 바로 괴로움의 덩이인 것이다. 이걸 오취온(五取蘊)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이상이 괴로움의 진리이니라.


괴로움의 원인(samudaya-sacca)은 무엇인가? 그건 윤회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나서 여기저기 새로운 쾌락을 찾아다니며 갈구하는 애착으로,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와 생존에 대한 갈애(有愛), 삶 자체를 거부하는 갈애(無有愛)가 있다.

그런데 이 갈애(渴愛 taṇha)는 어디에서 일어나 어디에 자리잡는가? 세상에서 즐기며 좋아하는 성질이 있는 바로 그곳에서 갈애는 일어나서 거기에 자리잡는다. 그러면 무엇이 즐기며 좋아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는가?

눈・귀・코・혀・몸・마음은 즐기며 좋아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바로 그곳에서 갈애는 일어나서 거기에 자리잡는다. 

보이는 형상・소리・냄새・맛・촉감・법(마음의 대상)은 즐기며 좋아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바로 그곳에서 갈애는 일어나서 거기에 자리잡는다.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은 즐기며 좋아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바로 그곳에서 갈애는 일어나서 거기에 자리잡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섯 감각의 장과 그 대상의 접촉, 거기에서 생긴 느낌, 여섯 감각 대상에 대한 인식・의도・갈애, 거기에 주의를 일으키는 작용(vitakka)・주의를 유지하는 작용(vicãra)은 즐기며 좋아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바로 그곳에서 갈애는 일어나서 거기에 자리잡는다.

비구들이여, 이상이 괴로움의 원인의 진리이니라.


괴로움의 소멸(nirodha-sacca)은 무엇인가? 그건 갈애가 완전히 사라져서 없는 것으로 습성을 버리거나 싫어하여 떠남으로써 모든 욕망에서 벗어난 상태이다.

그런데 갈애는 어디에서 버려지고 소멸되는가? 세상 어디든 즐기며 좋아하는 성질이 있는 바로 그곳에서 갈애는 버려지고 소멸된다.

눈・귀・코・혀・몸・마음은 세상에서 즐기며 좋아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바로 그 곳에서 갈애는 버려지고 소멸된다.

보이는 형상・소리・냄새・맛・촉감・법은 즐기며 좋아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바로 그곳에서 갈애는 버려지고 소멸된다.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은 즐기며 좋아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바로 그곳에서 갈애는 버려지고 소멸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섯 감각의 장과 그 대상의 접촉, 거기에서 생긴 느낌, 여섯 감각 대상에 대한 인식・의도・갈애, 거기에 주의(注意)를 일으키는 작용・주의를 유지하는 작용은 즐기며 좋아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바로 그곳에서 갈애는 버려지고 소멸된다.

비구들이여, 이상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진리이니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magga-sacca)은 무엇인가? 그건 8정도(八正道) 즉 바른 견해(正見), 바른 의도(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업(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마음 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

여기에서 바른 견해란 무엇인가?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확실히 아는 지혜가 바른 견해이다.

바른 의도란 무엇인가? 욕심 없고 악의 없으며 자비로운 경지를 향하여 마음을 기울이는 걸 바른 의도라 한다.

바른 말이란 무엇인가? 법을 보아 아는 이는 거짓말을 않고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으며, 이간질이나 거친 말을 하지 않는다.

바른 행위란 무엇인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은 걸 소유하지 않으며 청정한 행을 닦는 절제이다.

바른 생업이란 무엇인가?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는 말과 행위가 청정해서 잘못된 생활 수단을 버리고 올바른 생활 수단으로써 살아가느니라. 이것이 바른 생업이다.  

바른 노력이란 무엇인가? 아직 생기지 않은 불건전한 생각은 일어나지 않게 방어하려고, 이미 습성화된 악의는 버리려고 의욕적으로 노력한다. 그리고 아직 생기지 않은 건전한 생각은 일으키려고, 이미 습성화된 선의는 유지하면서 더욱 키우려고 의욕적으로 노력한다. 이것이 바른 노력이다.

바른 마음 챙김란 무엇인가? 그대는 몸들에서 몸을 몸으로, 느낌들에서 느낌을 느낌으로, 마음들에서 마음을 마음으로, 법들에서 법을 법으로 관찰하며 지낸다. 이렇게 온힘을 기울여서 쉬지 않고 대상을 챙기다 보면 그 본성이 드러나서 그걸 분명히 알게 되는 순간, 세상(오온)에 대한 탐심과 진심을 제어하여 놓아버리게 되니라. 이것이 바른 마음 챙김이다.

바른 삼매란 무엇인가? 그대는 감각적 욕망과 불건전한 생각을 떨쳐버린 후 주의(注意)를 일으키고 유지하는 데 전념해서, 사욕 없음에서 생긴 희열이 충만한 1선정에 든다. 그 다음 주의를 일으키고 유지하는 노력 없이도 절로 마음이 챙겨지는 상태에서 내심 고요하여 일념이 됨으로써 집중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감이 충만한 2선정에 든다. 그 후 희열이 가라앉으면 마음 챙김에 따른 고요함과 분명한 앎으로 행복감이 충만해서, 성자들이 소위 ‘행복한 이는 평화로운 가운데 늘 깨어 있는다’라고 말하는 상태에 머문다. 이와 같이 그는 3선정에 든다. 그 다음에는 이 행복감도 사라져서 즐거운 느낌도 괴로운 느낌도 넘어선 평등심에 의해 마음 챙김이 청정한 4선정에 든다. 이것이 바른 삼매이다.

비구들이여, 이상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이니라.


이와 같이 그대가 안으로 밖으로, 또는 안팎으로 사성제를 보이는 대로 관찰하면, 집중이 깊어질수록 법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과 그 원인을 알게 되고 사라지는 현상과 그 원인을 알게 되며, 생멸하는 현상과 그 원인을 분명히 알게 된다. 또한 그대는 사성제를 챙길수록 법은 단지 순수한 앎과 마음 챙김을 키우기 위한 매체일 뿐 그 속에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지혜가 차오름에 따라 갈애와 사견이 사라져서, 이 세상 어느 것에도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지낸다.


그러니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네 가지 관찰 대상을 챙겨서 7년 동안 이대로 닦는다면 현세에서 아라한(arahant)이 되거나 불환과(不還果 anāgamī)에 이를 것이다. 7년은 말할 것도 없고 6년 … 5 … 4 … 3 … 2 … 1년 동안 이대로 닦는다면, 1년은 말할 것도 없고 7개월 … 6 … 5 … 4 … 3 … 2 … 1개월 … 보름 동안 이대로 닦는다면, 아니 7일 동안만이라도 이대로 닦아 익힌다면 완전히 익힌 그 순간 아라한이 되거나, 아직 미세한 번뇌가 남아 있을 때는 불환과의 경지를 기대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중생의 마음의 정화를 위한, 슬픔과 설움을 넘어서기 위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의 소멸을 위한, 성스러운 진리를 알기 위한, 그리고 열반을 실현시키는 오직 한 길은 네 가지 대상을 완전하게 챙기는 것이다’는 이런 이유로 설(說)했느니라.”


이와 같이 붓다께서 말씀하시자 비구들은 그 말씀을 듣고서 기뻐하며 받들어 실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