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건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어떤 육체노동이든 다 그렇다.
그것 덕분에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망각한다.
아마도 광부는 다른 누구보다 육체노동자의 전형일 것이다.
그것은 광부의 일이 더없이 끔찍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너무나 필요함에도 우리의 경험과는 워낙 떨어져 있어 실제로 보이지 않고
그래서 우리가 혈관에 피가 흐르는 것을 잊듯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는 광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도 자괴감을 느낄 만하다.
그럴 때 우리는 잠시나마 '지식인'으로서의, 전반적으로 우월한 존재로서의 자기 지위를 의심하게 된다.
적어도 지켜보는 동안에는, 우월한 인간들이 계속 우월하기 위해서는
광부들이 피땀을 흘려야만 한다는 자각을 똑똑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p49)
이렇게 저열한 불편과 냉대를 당하고, 늘 기다려야 하고,
모든 걸 상대방 편한 대로 해야 하는 것은 노동 계급의 생활에선 당연한 일이다.
무수히 많은 영향력이 끊임없이 노동자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피동적인' 역할로 축소시켜버린다.
그는 행동하는 게 아니라 무엇에 따라 처신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신비로운 권위의 노예임을 자각하며,
자신이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른 그 무엇을 원해도 '그들'이 결코 허용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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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출신인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합당한 한계 내에서는 얻을 수 있다는
일정한 예상을 하고서 살아갈 수 있다.
때문에 비상시에 '배운' 사람들이 전면에 나서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재주가 더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교육'은 대개 그 자체로는 거의 쓸모없다.
하지만 그들은 남에게 어느 정도 존경을 받는 데 익숙하고,
그래서 남을 부리는 위치에 서는 데 필요한 낯이 있는 것이다. (p67-68)
실업이 남자든 여자든 모두를, 특히 여자보다는 남자를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무기력감은 아무리 지성이 뛰어나다 해도 떨쳐버리기 어렵다.
나는 필력이 뛰어난 실업자를 우연히 만나본 적이 있다.
그리고 만나보진 못했지만 이따끔 잡지에서 작품으로 접하게 되는 이들도 있다.
아주 드문드문하긴 해도 그런 사람들은 종종 뛰어난 글 한 편이나 단편소설을 써내곤 하며,
그런 글은 추천사만 요란한 대부분의 작품보다는 확실히 낫다.
그런데도 그들은 왜 자기 재능을 좀처럼 발휘하지 않는걸까?
그것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안락과 고독뿐 아니라(노동계급의 집에선 고독하기 어렵다)
마음의 평화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업이라는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운 상황에서는,
무엇엔가 전념한다는 것도 무언가를 창조하는 데 필요한 '기대감'을 발휘한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p111)
유감스럽게도 계급 차별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만으로는 아무 진전도 있을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이 없어지기를 바랄 '필요'는 있되,
그만한 댓가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 바람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직시해야 할 사실은, 계급 차별을 철폐한다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포기한다는 것을 뜻한다는 점이다.
여기 중산층의 전형적인 일원인 내가 있다.
내가 계급 차별을 없애기 바란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거의 모든 것은 계급 차별의 산물이다.
나의 모든 관념은(선악에 대한, 유쾌와 불쾌에 대한, 경박과 경건에 대한, 미추에 대한)
어쩔 수 없이 '중산층'의 관념이다.
책과 옷과 음식에 대한 나의 취향, 명예에 대한 나의 감각, 나의 염치, 나의 식사예절,
나의 어투, 나의 억양, 심지어 나의 독특한 몸동작도 전부 특정한 훈육의 산물이며,
사회 위계의 윗부분에 있는 특정한 지위의 산물이다.
그런 사실을 이해할 때, 나는 프롤레타리아의 등을 두드려주며
그가 나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고 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이해하게 된다.
그와 정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싶다면 단단한 각오가 필요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계급적 특권의 울타리 밖으로 나가기 위해, 은밀한 속물근성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취향과 편견도 억눌러야 한다.
나를 철저히 변화시켜야 하며, 결국엔 같은 사람인 줄 모를 정도로 달라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노동 계급의 현실을 개선하는 것으로도,
더 어리석은 형태의 속물근성을 억제하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삶에 대한 상류층적, 중산층적 태도를 완전히 버리기까지 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그럴 수 있느냐 없느냐는 아마도 그러기 위해 나에게 요구되는 것을
얼마나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p216-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