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息]/빈자의 양식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그러한 2011. 9. 8. 12:09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 김기택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어 답답할 줄 알았더니
일평생 꼼짝 못하고 한 자리에만 있어 외롭고 심심할 줄 알았더니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실뿌리에서 잔가지까지 네 몸 안에 나 있는 모든 길은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쉬지 않고 움직이는 그 구불구불한 길은
뿌리나 가지나 잎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나가는 너의 길고 고단한 길은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번개의 뿌리처럼 전율하며 끝없이 갈라지는 길은
괴팍하고 모난 돌멩이들까지 모두 끌어안고 가는 너의 길은
길을 막고 버티는 바위를 휘감다가 끝내 바위가 되기도 하는 너의 길은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추위로 익힌 독한 향기를 몰고 꽃에게 달려가는 수액은
가지에 닿자마자 소리 지르며 하늘로 솟구치며 터지는 꽃들은
온몸에 제 정액을 묻힐 때까지 벌 나비 주둥이를 쥐고 놓아주지 않는 꽃들은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한 몸으로 꽃처럼 많이도 임신한 너의 자궁은
불룩한 배를 가지마다 매달아놓고 무겁게 흔들리는 너의 자궁은
이빨 가진 입들을 빌려 자궁을 부숴버려야 밖으로 나오는 너의 씨앗들은

땅에 붙박인 채 오도 가도 못하고 살아도 죽어 있는 것만 같더니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어느 다리보다 먼 길을 지나온 네 몸이 발산하는 침묵은
다리 달린 벌레며 짐승들이 매일 들으며 자라는 너의 침묵은
잎에서 잎으로 길로 허공으로 퍼져나가 산처럼 거대해지는 너의 침묵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