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息]/밑줄 긋기

내가 나를 속이지 않으면

그러한 2012. 10. 23. 14:49

 

 

앉아 있을 때는 산 같아야 하고, 다닐 때는 개미 같아야 하고, 서 있을 때는 기둥 같아야 하고, 멈출 때는 못 같아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앉고 멈추고 다니고 서는 것이 법도에 맞게 될 것이다.

 

내가 나를 속이지 않으면, 다른 사람 그 어느 누가 감히 나를 속이겠는가?

밥이 있으면 밥을 먹고, 밥이 없으면 죽을 먹고, 돈이 있으면 쌀을 사들이고, 돈이 없으면 구걸한다.

쌀을 구걸하지 못하면 밥을 구걸하고, 밥을 구걸하지 못하면 죽을 구걸하고,

죽을 구걸하지 못하면 채소를 구걸하고, 채소를 구걸하지 못하면 단정히 앉아서 굶어 죽는다.

이것이 석가의 계율이다. 석가를 본받지 않고 재물이나 먹을 것을 쌓아두는 속된 중을 본받으면 되겠는가?

이때 굶어 죽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훗날 배불러 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하지 않겠는가?

언젠가는 죽는 날이 있는 법이므로, 굶어 죽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굶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또한 종일토록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쫓아다닐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함부로 문을 나서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서로 찾아뵙고 인사하는 예절 같은 것은 승가(僧家)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문을 나서서 바깥 세상을 볼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혹시 사부 혹은 사형이나 사제를 만나러 어느 암자 어느 곳에  가려 한다고 해도 절대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사부가 잠시 여기까지 와서 만나는 것만은 허락하되, 멀리서 왔으면 하루 묵게 하고,

가까이서 왔으면 식사 한 끼 하고 나면 돌아가 달라고 부탁한다.

...

이와 같이 하면 하루 종일 문을 닫아걸게 될 것이며, 문을 나서는 경우도 저절로 드물어질 것이다.

그러면 심신이 편안하고 안정될 뿐만 아니라 마음이 오로지 하나로 모아져서,

오래되면 저절로 편안함이 느껴지고 또한 번거롭게 세상 사람을 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서방(西方)의 어떤 곳인들 가보지 못하겠으며. 어떤 큰 일인들 훤히 알지 못하겠는가?

 

 

 

- 이지(탁오), <분서 焚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