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살아보자
다른 사람과 인연을 맺는 일에는 번민이 동반된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분명히 하려면 자신이 누구인지 밝혀야 하고, 책임이나 실패의 위험부담도 생겨난다.
그러니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가는 게 더 편하고 안전한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디에도 뿌리를 박지 못한 채, 어느 경우에도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책임이나 위험부담을 회피하며 살아가는 것만큼 공허한 삶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가는 것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위험을 피하려고 힘들게 찾아온 기회를 포기하거나 인생의 가능성을 좁혀버리면,
그것으로 정말 위험을 피했다고 할 수 있을까?
정말 필요한 것은 불안이나 공포로부터 도망치는 게 아니라,
그것들 앞에서 과감히 자신을 드러내고 맞서는 게 아닐까?
불안이나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삶이라고 한다면,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자신의 인생으로부터 도망치는 것과 같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계속 도망쳐봤자 마지막 순간에는 죽음이 쫓아와 당신을 집어삼킨다.
스스로를 관 속에 집어넣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죽음이 찾아오고 관 속에 들어가게 된다.
마지막은 모두 똑같다. 죽으면 불에 타 재가 된다. 도망쳐도 소용없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즉 마지막은 파멸과 절망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과만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모두가 패배자이다. 어떤 도전도, 결과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마지막은 실패다.
이것은 불편의 진리이다.
우리는 그 결과를 선택할 수 없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뿐이다.
도전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 그뿐이다.
도망치며 살 것인가, 불안이나 공포와 맞서며 살 것인가?
상처받는 것을 피하려고 자신의 인생으로부터 계속 도망칠 수도 있고,
도망치는 것을 그만 두고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며 살 수도 있다.
어떤 것을 선택할지는 당신 자신의 몫이다.
거꾸로 말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도전할 수 있다.
결과는 실패라 하더라도 도전할 자유가 있는 것이다.
실패라는 결과에만 사로잡혀 살 것인가,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가능성이라는 과정을 음미하며 살아갈 것인가?
결국 인생은 결과에 의미가 있지 않다. 그 묘미는 과정에 있다. 도전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피하면 인생이라는 과일을 맛보지 못한 채 썩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과일은 어차피 썩기 마련이다. 그러니 썩기 전에 먹은 게 무슨 문제랴.
- 오카다 다카시, <나는 왜 혼자가 편할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