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息]/밑줄 긋기
이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을 만큼...
그러한
2020. 1. 22. 15:02
내 사랑하는 아가야.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네가 살아있었더라면 지금의 나처럼 될 수 없었을 거야.
그것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잖니.
아기를 갖고 동시에 있는 그대로의 이 세상을 경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를 내보낸 곳이 바로 이 세계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계에 집착하는 것은 아기 때문이며,
아기 때문에 세계의 미래를 생각하고 그 소란스러움, 그 소요에 기꺼이 참여하며
이 세계가 저지르는 바로잡을 수 없는 바보짓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거란다.
너의 죽음을 통해 너는 너와 함께 있는 즐거움을 내게서 앗아 갔지만 동시에 나를 자유롭게 해 주었지.
내가 사랑하지 않는 이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자유로워졌단다.
내가 감히 이 세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네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나의 암울한 생각이 너에게 어떤 저주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네가 나를 떠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깨달았단다.
너의 죽음이 하나의 선물, 내가 결국 받아들이고 만 끔찍한 선물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 밀란 쿤데라,<정체성>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