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息]/빈자의 양식

비 오는 날에

그러한 2008. 9. 11. 13:19

 

   비 오는 날에

 

   - 나희덕

 


   내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비닐 우산이여
   나의 우산은 팽팽하고
   단단한 강철의 부리를 지니고 있어
   비 오는 날에도 걱정이 없었거니
   이제는 걱정이 된다
   빗속을 함께 걸어가면서 행여
   댓살 몇 개가 엉성하게 받치고 선
   네 약한 푸른 살을 찢게 될까 두렵구나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
   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들게 한다면
   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 두겠다
   몸이 젖으면 어떠랴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데
   빗발이 드세기로
   우리의 살끼리 부대낌만 하랴
   비를 나누어 맞는 기쁨,
   젖은 어깨에 손을 얹어
   따뜻한 체온이 되어줄 수도 있는
   이 비 오는 날에
   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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