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識]/위빠사나(명상)

대념처경 - 법에 대한 마음챙김

그러한 2009. 9. 5. 13:53

 

4 법에 대한 마음챙김 [法念處]

<다섯 가지 종류의 육체적∙정신적 현상에 대한 마음챙김>


4.1 다섯 가지 덮개[五蓋]에 대한 마음챙김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다섯 가지 덮개[五蓋]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낸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다섯 가지 덮개[五蓋]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있다"라고 안다.

또는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없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없다"라고 안다.

그리고 생겨나지 않은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감각적 욕망이 사라지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사라진 감각적 욕망이 이후에 생겨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을 안다.

 

또는 내적으로 악의(惡意, 분노)가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악의(惡意)가 있다"라고 안다.

또는 내적으로 악의가 없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악의가 없다"라고 안다.

그리고 생겨나지 않은 악의가 일어나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악의가 사라지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사라진 악의가 이후에 생겨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을 안다.

 

또는 내적으로 혼침과 졸음이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혼침과 졸음이 있다"라고 안다.

또는 내적으로 혼침과 졸음이 없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혼침과 졸음이 없다"라고 안다.

그리고 생겨나지 않은 혼침과 졸음이 일어나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혼침과 졸음이 사라지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사라진 혼침과 졸음이 이후에 생겨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을 안다.

 

또는 내적으로 들뜸과 회한(우울)이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들뜸과 회한이 있다"라고 안다.

또는 내적으로 들뜸과 회한이 없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들뜸과 회한이 없다"라고 안다.

그리고 생겨나지 않은 회한이 일어나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들뜸과 회한이 사라지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사라진 들뜸과 회한이 이후에 생겨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을 안다.

 

또는 내적으로 회의적 의심이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회의적 의심이 있다"라고 안다.

또는 내적으로 회의적 의심이 없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회의적 의심이 없다"라고 안다.

그리고 생겨나지 않은 회의적 의심이 일어나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회의적 의심이 사라지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사라진 회의적 의심이 이후에 생겨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을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법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4.2 다섯 가지 집착된 무더기[五取蘊]에 대한 마음챙김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다섯 가지 집착된 무더기[五取蘊]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낸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다섯 가지 집착된 무더기[五取蘊]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비구가 ‘이것은 물질적 현상[色]이다’, ‘이것은 물질적 현상의 발생이다’, ‘이것은 물질적 현상의 소멸이다’라고 안다.

‘이것은 감수 작용[受]이다’, ‘이것은 감수작용의 발생이다’, ‘이것은 감수작용의 소멸이다’라고 안다.

‘이것은 표상 작용[想]이다’, ‘이것은 표상 작용의 발생이다’, ‘이것은 표상 작용의 소멸이다’라고 안다.

‘이것은 형성 작용[行]이다’, ‘이것은 형성 작용의 발생이다’, ‘이것은 형성 작용의 소멸이다’라고 안다.

‘이것은 인식 작용[識]이다’, ‘이것은 인식 작용의 발생이다’, ‘이것은 인식 작용의 소멸이다’라고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법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집착된 무더기[五取蘊]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4.3 여섯 가지 인식 기관과 인식 대상에 대한 마음챙김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여섯 가지 내적인 인식 기관과 외적인 인식 대상[六內外處]이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낸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여섯 가지 내적인 인식 기관과 외적인 인식 대상이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내는가?

 

여기에 비구가 눈[眼; 시각 기관]을 알아차리고, 색[色; 시각 대상으로서의 모양과 색깔]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생겨난 (번뇌의) 족쇄[結; samyojana]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족쇄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족쇄가 끊어지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끊어진 족쇄가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귀[耳; 청각기관]를 알아차리고, 소리[聲]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생겨난 (번뇌의) 족쇄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족쇄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족쇄가 끊어지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끊어진 족쇄가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코[鼻; 후각기관]를 알아차리고, 냄새[香]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생겨난 (번뇌의) 족쇄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족쇄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족쇄가 끊어지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끊어진 족쇄가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혀[舌; 미각기관]를 알아차리고, 맛[味]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생겨난 (번뇌의) 족쇄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족쇄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족쇄가 끊어지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끊어진 족쇄가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몸[身; 촉각 기관]을 알아차리고, 접촉[觸]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생겨난 (번뇌의) 족쇄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족쇄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족쇄가 끊어지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끊어진 족쇄가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마음[意; 사고 기관]을 알아차리고, 마음의 현상[法]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생겨난 (번뇌의) 족쇄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족쇄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족쇄가 끊어지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끊어진 족쇄가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법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내적인 인식 기관과 외적인 인식 대상[六內外處]이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4.4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七覺支]에 대한 마음챙김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낸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요소[念覺支; sati-sambojjhaṅga]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또는 내적으로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완성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법에 대한 고찰의 깨달음의 요소[擇法覺支; dhamma-vicaya-sambojjhaṅga]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법에 대한 고찰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또는 내적으로 법에 대한 고찰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법에 대한 고찰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법에 대한 고찰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법에 대한 고찰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완성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精進覺支; viriya-sambojjhaṅga]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또는 내적으로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완성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기쁨의 깨달음의 요소[喜覺支; pīti-sambojjhaṅga]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기쁨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또는 내적으로 기쁨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기쁨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기쁨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기쁨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완성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심신의)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輕安覺支; passaddhi- sambojjhaṅga]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심신의)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또는 내적으로 (심신의)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심신의)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심신의)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심신의)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완성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定覺支; samādhi-sambojjhaṅga]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또는 내적으로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완성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평온의 깨달음의 요소[捨覺支; upekkhā- sambojjhaṅga]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평온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또는 내적으로 평온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평온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평온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평온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완성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법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七覺支]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4.5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에 대한 마음챙김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낸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네 가지 고귀한 진리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올바르게 [있는 그대로; yathābhūtaṃ] 안다.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원인)이다’라고 올바르게 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올바르게 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올바르게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법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4.6 네 가지 마음챙김의 이익 - 마음챙김 수행에 의한 깨달음의 보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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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들이여, 이것은 모든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기 위한, 괴로움과 마음의 언짢음을 없애기 위한,

올바른 길에 이르기 위한, 열반을 깨닫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바로 그것은 네 가지의 마음챙김이다라고 앞에서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연유로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세존은 설하셨다. (설법을 들은) 그 비구들은 만족해하며, 세존의 설법에 대해 환희에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