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평생을 서울 백악산(白岳山) 아래와 파주의 우계(牛溪)에서 살다간 은일지사(隱逸之士)이다. 그는 문자보다는 자기 수양에 힘써서 그런지 문집의 양도 소략하고 남아 있는 시도 적다.
이 시는 그가 파주의 파평산(坡平山) 아래 우계에서 은거할 때 쓴 시이다. 성수침의 아들 성혼(成渾)이 문묘에도 배향될 정도로 유명하기 때문에 우계하면 곧바로 성혼을 떠 올리는 바로 그곳이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적 충일을 일궈가는 평담한 마음이 시에 어려 있다.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쓰며 안빈낙도의 삶을 추구하는 참된 처사만이 보여줄 수 있는 시풍이다.
3행에서 ‘옛 시내[古澗]’라고 말한 것은 저자가 1543년, 51세에 동생 성수영(成守瑛)이 고을 수령을 하던 충청도 덕산(德山)으로 모친을 모시고 갔다가 그 다음해에 동생이 형의 뜻을 알고 적성 현감(積城縣監)을 자청하여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성수침은 원래 겸재 정선의 그림(1755년 작)에도 나오듯이 백악산 아래 청송당(聽松堂) 을 짓고 살다가 1541년에 아내의 고향인 파주에서 이태 정도 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아마도 우계에 죽우당(竹雨堂)을 짓고 살 무렵에 지었을 듯하다. 그리고 4행에서 갓끈을 물에 씻는 것은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는다.[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라고 한 대목에서 유래한 말로 고결한 삶의 지향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필자의 과문인지는 몰라도 오늘날 현대시에는 이런 삶의 자세와 마음을 드러내는 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다. 우리 현대시는 주로 열정, 시적 긴장, 새로운 이미지와 시선, 개성, 이런 방향으로 나가다 보니, 우리 전통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이런 은일의 정신은 그 시맥이 끊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 시가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시에 담긴 자기 수양의 자세랄까, 내면의 충일감 같은 것도 그렇거니와, 이 시에 대해 임억령(林億齡), 조식(曺植),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송순(宋純)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당대의 명사 14분이 차운(次韻)하여 시를 남기고 있는 점이다. 일종의 은거에 공감하는 당대의 선비문화를 형성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더욱이 대략 200년이 지나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이 이 시를 본떠 자신의 지취를 드러내고 있는 것에서 그 영향을 더욱 실감하게 한다.
한산의 남쪽에 漢山之南 툭 트인 골짝 하나 呀然一谷 봄이면 밭 갈고 가을이면 수확하여 春耕秋穫 구차하지 않게 분수대로 사네 安分無辱 옛날 어진 임금을 노래하고 歌詠先王 천고의 현자를 벗 삼아 尙友千古 넉넉하고 한가로이 優哉遊哉 외로운 이 삶을 즐기노라 樂此踽踽
<파산체를 본받아 감회를 읊어 잠옹(潛翁) 남하행(南夏行) 어른에게 바치다[效坡山體詠懷, 贈潛翁南丈夏行] >
시의 제목에서 말하고 있는 파산체는 바로 성수침이 쓴 앞의 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의 형식과 담고 있는 지취를 따져 보면 그 근원이 《시경(詩經)》 <위풍(衛風) 고반(考槃)>에 가 닿는다. 3장으로 된 시 중에서 제1장을 본다.
은거하는 곳이 시냇가에 있으니 考槃在澗 큰 선비의 마음이 넉넉하도다 碩人之寬 홀로 자고 홀로 깨어 말하나 獨寐寤言 길이 이 즐거움 잊지 않으리라 永矢弗諼
<모시서(毛詩序)>에는 위나라 장공(莊公)이 선왕의 덕업을 계승하지 못하여 어진이로 하여금 물러나 곤궁하게 살도록 했기 때문에 장공을 풍자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였다. 선비들이 공부하는 것은 본디 자기 수양을 기반으로 세상에 나아가 뜻을 펴려는 것인데, 그런 뜻을 접고 은거한다는 것은 현실 정치에 대한 불만과 자신의 뜻을 펴 볼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성수침 역시 1519년에 일어났던 기묘사화로 신진사류였던 조광조 일파가 일망타진당하는 것을 보고 은거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또 이 시에 관류하고 있는 정신은 유종원(柳宗元)의 산수유기(山水遊記)와 아주 밀접한데 특히 마지막 두 구절은 유종원의 <영주용흥사동구기(永州龍興寺東丘記)>에서 온 것이다. 유종원은 당시 반대 당파에 의해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되어 산수에 마음을 붙이며 다소 철학적인 향취가 풍기는 영주팔기(永州八記) 등의 뛰어난 유기 작품을 썼다. 산수유기에 특히 뛰어난 그의 글과 지취가 성수침의 상황과 성향에 잘 맞아 떨어졌을 법하다.
이렇게 보면 이 한 편의 시작품은 당대의 은거 문화를 이해할 수도 있고 위로는 유종원의 유기와 시경에 가 닿고 아래로는 안정복의 시에 그 흐름이 연결된 것을 알 수 있다. 한시의 이해는 이렇듯이 그 개별 작품도 작품이지만 시간과 공간을 연결해 보았을 때 그 의미가 더 깊어지는 것이 많다. 한 편의 시는 개별 작품으로 독립되어 있지 않고 유구한 동아시아 한시 문화의 전통 속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온통 남에게 보이는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끌고 나가다 보니 이런 분들이 어디 있는지 잘 알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논어(論語)》 <학이(學而)>편의 첫 머리에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불평하지 않으면 정말로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라고 한 말이 참으로 엄중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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