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붓다가 한 제자의 질문에 대답했다.
“브하그완, 당신은 언제나 용서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몇 번까지입니까?”
사실 그런 질문을 했다는 것은 그 제자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충분한 증거이다. 그것은 횟수의 문제가 아니다. 용서란 단순히 그대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는 그가 존재하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이다. 용서란 그를 판단하지 않으며 그대가 판단적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보통 우리는 용서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그가 잘못했는데 그대가 그를 용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먼저 그대가 판단하고 나서 용서하는 것이다. 그대의 용서는 가짜다.
진정한 용서는 판단이 없다. “아니야 당신이 잘못했는데 내가 용서하는 거야.” 라고 말하는 법이 없다. 용서는 단순히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원한도 불평도 험담도 없는 것이다. 애초부터 분노가 없기 때문에 실제로 용서할 문제가 없는 것이다.
에고는 불행을 먹고 산다. 좀 더 불행할수록 에고에 양식을 주는 것이다. 축복으로 가득한 순간에 에고는 전적으로 사라진다. 반대로 에고가 사라지면 축복이 그대에게 퍼부어지기 시작한다. 그대가 에고를 원하면, 그대는 용서할 수 없다. 특히 마음의 상처와 손해, 모욕과 박대와 불쾌를 그대는 잊을 수 없다.
잊을 수 없을뿐더러 그대는 그것을 과장하고 강조할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인생에서 아름다웠던 모든 것들을 잊으려 할 것이고 기쁨의 순간들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에고에게 봉사하는 바가 없다. 기쁨은 에고에는 독과 같고 불행은 비타민과 같다.
그대는 에고의 모든 작용기제를 이해해야 한다. 그대가 용서하려 든다면 그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 노력으로 억누를 뿐이다. 그대의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모든 게임의 어리석음을 이해할 때만 그대는 용서할 수 있다. 그 모두가 전적으로 불합리하다는 것을 겪고 또 겪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가 한쪽에서 억누르는 것이 다른 쪽에서 뛰쳐나오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는 한 가지 형태로 그것을 억누를 것이지만 그것은 다른 형태로 그 자신을 주장할 것이다. 어떤 때는 그것이 너무도 미묘해서 똑같은 옛날의 구조라는 것을 알아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은 고쳐지고 꾸며지고 새로이 장식되기 때문에 거의 새로운 것처럼 보인다.
에고는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부정성으로 영위해 간다. 그것은 ‘아니’라고 말함으로 존재한다. ‘아님’은 에고의 영혼이다. 그리고 그대가 어떻게 축복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대는 불행과 삶의 고뇌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꽃들이나 별들 그리고 일몰 등 모든 아름답고 신성한 것들에 그대가 어떻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예수는 “너의 적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의 말이 옳다. 왜냐하면 그대가 적들을 용서할 수 있으면 그대는 그들로부터 자유로울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때 그들은 그대를 계속 사로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의는 우정의 일종이다. 그것은 그대의 소위 사랑이라고 하는 것보다 더 깊다.
그대가 말하는 사랑이란 그렇게 깊지 않다. 그것은 단지 살가죽의 깊이일 뿐이다. 전혀 깊이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의 증오는 에고만큼이나 매우 깊이 내려간다.
기억해야 할 첫째의 것은, 에고가 존재에 있어서 가장 부정적인 현상이라는 점이다. 에고는 어둠과 같다. 어둠에는 긍정적인 존재가 없으며 단순히 빛의 부재일 뿐이다. 빛은 긍정적인 존재를 갖는다. 그대가 어둠에서는 직접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대의 방이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대는 방의 어둠을 박으로 놓을 수가 없다. 그대는 어둠을 밖으로 던질 수가 없다. 그대는 어떠한 직접적인 수단으로도 그것을 파괴할 수 없다.
빛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라. 어둠에 직접적으로 부딪쳐서는 아무것도 되어질 수가 없다. 부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에고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미워하는 것들을 계속 가지고 다닌다. 그들은 미움 속에서 산다. 그들은 상처를 만지작거리면서 치료는 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처를 치료할 생각이 없다. 그들의 전 생애가 그들의 과거에 의존해 있다.
그대가 현재에 살기 시작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과거를 잊을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다. 나는 그대에게,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일을 잊고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방식이 아니다. 나는 말한다. 현재에 살라. 달리 말하자면, 좀 더 명상적이고 좀 더 깨어있고 좀 더 주의성을 가져라. 왜냐하면 그대가 주의해서 깨어있을 때에만 그대는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깨어있음은 과거에 있을 수도 없고 미래에 있을 수도 없다. 깨어있음은 오로지 현재만을 안다. 깨어있음은 과거도 미래도 모른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의 시제인 현재를 가지고 있다.
깨어 있어라. 그러면 그대는 점점 더 현재를 향유할 수 있게 된다. 그대가 현재에서 존재의 축복을 느낄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계속 저질러대는 어리석은 일들을 멈추게 될 것이다. 그대는 과거지향을 끝낼 것이다. 그대는 잊고 용서해야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단순히 저절로 사라지게 되어 있다.
그대는 놀랄 것이다. 그것이 어디로 갔담? 그리고 일단 과거가 없어지면 미래 또한 사라진다. 왜냐하면 미래는 과거의 투사일 뿐이기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맨 처음으로 자유를 맛보며 또한 신을 맛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 속에서 인간은 전체적이고 건강하게 된다. 모든 상처들이 치유된다. 갑작스럽게 상처들이 모두 없어진다. 그대는 그대 안에서 솟아나는 깊은 행복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 행복이 변형의 시작이다.
- 오쇼 라즈니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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