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息]/솔솔님 글

[스크랩] 천마총 돌담길

그러한 2008. 8. 30. 13:12
깊은 가을 날 천마총 돌담길을 거닐어 보세요.

천년의 세월을 잉태한 푸른 이끼 낀 돌담길을 거닐면 왕의 무덤에서 불어오는 긴 한숨 같은 바람. 그 바람과 함께 날아드는 왕의 눈물로 얼룩진 낙엽들. 그 낙엽들을 가슴 가득 안으면 천년의 시간 속에 화석이 된 왕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지러운 세상을 멀미하며 쓰러질 듯 위태롭게 걸어가는 나를 붙드는 왕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낍니다. 세상을 위해 울어주는 왕의 눈물을 봅니다.

달빛이 가득 담겨오던 지붕 낮은 한옥 집에 살았습니다. 가난이라는 이름에 몸살 앓으며 현기증 나도록 어지러운 세상을 도피하듯 내가 잠시 머물던 곳, 경주의 천마총 돌담길 옆집.
미로 같은 골목, 그 익숙치 않은 골목길을 나는 헤매곤 했습니다.

일요일이면 아이들 손을 잡고 왕의 무덤으로 산책을 나가곤 했는데 큰 아이는 무덤 꼭대기에 올라가 잔디썰매를 탄다고 했습니다. 나는 커다랗고 둥그런 능을 바라만 보아도 좋았습니다. 내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넉넉한 품으로 안아주는 그 느낌이 좋았습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둥그런 능을 바라보며 신의 입김처럼 따스한 노을이 내 어깨에 닿을 때까지 앉아 있곤 했습니다.

사람이 그리우면 아이들과 천마총 돌담길을 걸어 시내로 나갔습니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누구와 마주치더라도 낯선 도시 낯선 얼굴들. 손바닥만한 시내 몇 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작은아이는 내 등에 업혀 잠이 들곤 했습니다.
아이들이 깊이 잠든 후에는 따스한 불빛이 있는 집 앞 술집에 가서 술도 마셨습니다. 한 잔, 두 잔, 세 잔, 그때 술을 배웠습니다. 인생이란 것이 무엇인가도 조금은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삶을 위한 고단한 노동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살짝 잠이 들곤 했습니다. 반쯤 감긴 눈으로 정류장에 내려 시내를 지나 집으로 가는 길 위에 천마총이 있습니다. 돌담길을 지날 때면 구멍 난 가슴마다 숭숭 박혀오던 푸른 이끼 빛 외로움이, 거짓 웃음 지으며 사람들을 만나야 했던 괴로움이 밀려들었습니다.

삶의 길목에서 만난 세찬 바람 앞에 쌓아왔던 꿈과 희망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스스로 일어서 내 무릎의 먼지들을 훌훌 털어 버리고 당당하게 걸어가고 싶었습니다.생활이 아무리 고단하고 비참하게 느껴지더라도 누구에게도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천마총 돌담길 위에 흘렸는지 모릅니다.

두고 온 고향, 두고 온 사람들을 생각하며 돌담길 따라 집으로 가는 길, 나약함의 눈물 자욱을 지우곤 했습니다. 아직도 낯선 집에서 하루종일 엄마를 기다렸을 아이들에게 화사하게 웃는 모습으로 다가가기 위하여, 집에 가까이 오면 나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리곤 했습니다.

아! 내 아이들. 뼈가 으스러지도록 안아주고 싶은 내 목숨보다 소중한 아이들이 있어 난 외로움을 견뎌낸 겁니다.

천마총 돌담길, 무섭도록 고즈넉한 그 길은 서럽도록 외롭게만 느껴지던 내 자신을 뒤돌아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신라 천년의 역사를 안고, 영욕의 세월을 안고 둥그런 가슴 내밀며 누워있는 왕릉이 있던 그 길을 거닐며 인생을 좀 더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겸허한 자세는 우리를 아름답게 만들지요. 나를 비우고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며 그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만듭니다. 지금의 내 모습이 조금이라도 아름답다면, 그 아름다운 마음으로 시를 쓰고 있다면..... 내 인생의 뒤안길인 천마총 돌담길을 거닐었기 때문 일겁니다.

지금은 경주를 떠나 다른 도시에 살고 있지만 해마다 가을이 깊어지면 다시 한번 천마총 돌담길을 거닐고 싶습니다. 온실 속의 나약한 화초가 아닌 비바람과 당당히 맞서 이겨낸 생명력을 지닌 들꽃으로 피어나게 한 내 삶의 눈물로 얼룩진 추억 속의 그 길을 거닐며 지난날 많이 아팠던 나에게 뜨겁고도 긴 입맞춤을 해주고 싶습니다.
출처 : 삶, 명상 그리고 호두마을
글쓴이 : 솔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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