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息]/빈자의 양식

속리산에서

그러한 2008. 9. 11. 13:08

 


   속리산에서

 

   - 나희덕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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