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당신은 붓다의 가르침을 인용한다. 당신은 불교를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대답; 나는 “주의”(-ism)에 관심이 없다. 나는 법(dhamma), 즉 붓다의 가르침을 가르친다. 붓다는 결코 어떤 주의(-ism)나 교파적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무엇, 즉 “삶의 기술”을 가르쳤다. 계속되는 무지는 모든 사람에게 해로울 뿐이다. 지혜의 개발은 모두를 위한 선(善)이다. 그래서 누구든 이 수행법을 실천해 보면 실제적인 유용성을 발견할 것이다. 기독교인은 보다 좋은 기독교인이 되고, 유대인은 보다 나은 유대인이 되고, 이슬람교인은 보다 좋은 이슬람교인이 되고, 힌두교인은 보다 나은 힌두교인이 되고, 불교인은 보다 좋은 불교인이 될 것이다. 사람은 종교와 관계없이 먼저 선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좋은 기독교인 유대인 이슬람교인 힌두교인 불교인이 될 수 없다. 어떻게 선한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다.
질문; 당신은 조건(condition)에 관하여 말한다. 비록 긍정적인 것이긴 하지만 이것은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 조건화시키는 훈련은 아닌가?
대답; 정반대다. 오히려 수행의 과정은 형성된 조건을 벗겨 내는 과정이다. 마음에 무엇을 부담 주는 대신 자연스럽게 불건전한 특징들을 제거시킨다. 그래서 오직 건전하고 긍정적인 품성만 남게 된다. 부정적인 덕행을 제거해 기본적이고 순수한 마음의 본성인 긍정성을 드러낸다.
질문; 그러나 일정한 시간 동안 특별한 자세로 주의 집중하고 앉아 있는 것은 조건화의 형태가 아닌가?
대답; 만약 당신이 게임이나 기계적 의례처럼 행한다면 이땐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을 조건화시키고 있다. 이것은 잘못된 수행이다. 만약 올바르게 비파사나를 행한다면 당신은 진리를 직접 경험을 통해 올바르게 이해할 것이고 이전의 모든 조건 지워진 것들은 붕괴될 것이다.
질문; 수행법(자신을 관찰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10일 수련 코스”가 왜 필요한가?
대답; 물론 더 길다고 해도 당신은 보다 잘하기 위해 참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10일은 수행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최소한의 시간이다.
질문; 왜 우리는 10일 동안 이 수련센터 안에 있어야만 하는가?
대답; 왜냐하면 당신은 이 안에서 마음을 수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술은 병원에서 감염으로부터 보호된 수술실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 명상센터 안에서 당신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이 과정이 끝나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질문; 이 수행법은 육체의 병도 치료되는가?
대답; 그렇다. 일종의 부산물로써 많은 육체의 질병은 정신적 긴장이 해소되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만약 마음이 안절부절못하여 불안해지면 육체의 질병도 생겨난다.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하면 자동적으로 육체의 고통도 소멸된다. 그러나 마음의 정화 대신에 당신이 육체의 치료를 목적으로 수행법을 이용한다면 당신은 그 어느 쪽도 얻을 수 없다. 육체의 질병을 치료할 목적으로 이 수련센터에 온 사람들은 주의 집중을 온통 환부에 고정시킨다. “오늘은 좋아질까? 아닌데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어.” “오늘은 차도가 있을까? 아닌데.” 이렇게 그들은 10일을 낭비해 버린다. 그러나 그들이 만약 정신집중을 올바르게 마음의 정화에 둔다면 자동적으로 많은 질병이 그 명상수행의 결과로 소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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