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息]/솔솔님 글

[스크랩] 다락방에 숨겨놓은 남자

그러한 2008. 8. 30. 13:02
출처 : 시와 음악이 있는 풍경
글쓴이 : 바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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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에 숨겨놓은 남자




한 남자 다락방에 숨겨놓고 사는 게 헐거워질 때 꺼내 보겠네.

눈 속에 담긴 까만 하늘,
그 온전한 결을 해독하며
내 영혼의 상한 뿌리까지 진저리 쳐보고 싶네.

그 남자 가슴에 고인,
푸른 아픔 한바가지 퍼마시면
바싹 타들어가는 생의 갈증 적실 수 있겠네.

다락방 들창으로 스며든 햇살 펴고 그 남자 다리 베고 누워,
내 좋아하는 시 읽어주며 서걱거리는 무릎 뼈 어루만져주고 싶네.
미열의 들창을 노을이 기웃거릴 쯤,
그남자 추운 혈관 속으로 들어가 잘 익은 강물로 흐르고 싶네.


1.나무와 달과 하얀 새


푸른 별들이 사그락사그락 다락방 들창을 긁어대는 밤,
창을 여니 그대 그림 속 달을 먹은 노란 새만 어지러이 날아다닙니다.

밤 깊도록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이여,
별빛 흠뻑 마시며 둥둥 떠오르게 하는 이여.
둥둥 떠올라도 가 닿을 수 없는 이여,
별빛 쏟아내느라 발끝이 다 아파옵니다.

푸르게 깊어가는 밤,
청잣빛 다기로 우려낸 맑은 차 한 잔 드리고 싶은데
드릴 수 없습니다.

하늘을 물들이고도 남을 노을빛 물감 사드리고 싶은데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그리움을 그려 엽서를 보낸 사람.
순한 눈망울의 소가되어 노을을 배경으로 암울한 시대를 울부짖던 사람.
벌거벗은 아이들 그리고 나무와 달과 하얀 새를 그린 사람.
담뱃갑 속의 은지에 아픔을 새겨 넣은 사람,
정신병자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자화상을 그려야만 했던 사람.
그리운 이들을 눈 내리는 창가에 앉아 기다리다 마흔 살이 된 사람.
나뭇가지에 걸린 달, 물고 날아간 하얀 새 기다리다
지금의 내 나이 마흔 살에 홀로 숨을 거둔 사람.
불꽃같은 삶과 혼이 담긴 그림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아버린 사람.

흘러내린 앞머리가 지성의 이마는 가려도 눈빛은 가릴 수 없었던 그 남자,
이중섭이 내 다락방 문을 삐걱 열며 걸어들어 옵니다.



2.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당신의 시어들이 하얀 눈송이가 되어
내 다락방 들창으로 폴폴 스며드는 밤, 나 그대에게 가요.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의 습하고 춥고 눅눅한 곳에서
슬픔이며 어리석음을 새김질 하는 그대에게 가요.

세상의 모진 바람 속에서도
굳고 정한 갈매나무로 서 있는 그대에게 가 비스듬히 기대요.
하찮고 쓸모없는 것들을 태워 세상을 환하고 따스하게 품어주는
모닥불 같은 그대 온기를 느껴요.
눈을 감고 백석시선집을 더듬으면
팔딱거리는 시어들 사이로 그대 영혼의 지느러미가 만져져요.

푸시킨 보다 아름다운 그대,
가난하고 못난 것들을 글썽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대,
소외된 존재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고자 하는 그대.
그런 그대에게 드리는 나의 고백은 기도처럼 간절하고 애틋하답니다.
다소곳이 내려앉는 저 눈처럼 순결하고 겸허하답니다.

오늘처럼 눈이 시가 되어 내리는 날은
흰 당나귀를 타고 만주벌판으로 달려갑니다.

흰 바람벽에 쓸쓸히 홀로 기대앉아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라고
고조 곤히 읊조리는 그대에게 갑니다.
가난하고 못생긴 내가,
사랑스런 여인 나타샤가 되어 그대에게 달려갑니다.

따스한 가슴을 열어놓고 기다리시구려.
동백 꽃 같은 등불을 걸어놓고 기다리시구려.
그대 가슴에 닿아 한순간에 녹아내릴지라도,
뚝뚝 송이채 떨어져 내리는 동백꽃이 될지라도.



3.억압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라



장 코르미에가 지은 붉은 책 '체 게바라 평전'을 읽네.
혁명처럼 붉은 책 표지를 넘겨,
오래된 흑백사진 속 검은 베레모에 긴 머리칼,
열정적인 눈빛과 단정한 입술,
희랍의 조각처럼 잘 생긴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네.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
안락하고 풍족한 삶을 스스로 포기하고
고난으로 가득 찬 길에서 시인으로 의사로 혁명가로
게릴라전술가로 치열하게 살고 있는 그대곁을 오래도록 거니네.

온전한 살점이라고는 거의 남아 있지 않는
나환자들에게 손을 내미는 아름다운 청년을 만나네.
게릴라전을 펼치며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니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 그대를 읽네.

아프리카 콩고의 밀림과 볼리비아 정글에서
천식으로 고통 받는 그대를 숨 고르며 읽어야 하네.
읽다가 덮어야 하네.
내 가슴이라도 쓸어내려야 하네.

다시 책을 펴 383페이지에서 그대가 한 말에 밑줄 그으며 읽네.
“사흘 동안 먹지도 자지도 못한 이들과 함께 걸으면서
나는 이들에게 온기를 불어 넣을 수만 있다면
내 혈관이라도 잘라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목멘 소리로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을 그들에게 했다.”
소름이 돋도록 물컹하게 와 닿는 그대 목소리에 나도 일어나 그대를 따르네.

푹푹 빠져 한 발짝도 옮기기 힘든 진창길을 따라가네.
끝도 보이지 않는 늪지대를 걸어가네.
머뭇거리고 더듬거리며 기웃거리고 맴돌며 살아온 내가
꿈틀거리는 혁명의 길을 걸어가네.

볼리비아 정글에서 서른아홉의 나이에 눈을 감지 못하고
세상과 작별을 고한 그대 눈동자가 내게 말하네.
"억압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라"





도서관 딱딱한 의자에 앉아 몇 시간을 꼼짝 못하고
책속에 빠지게 하는 인물들이 있다.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음에도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이들이 있다.

죽음 앞에서 부귀와 명예와 권세 같은 것들은
한낱 바람 앞의 등잔불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살아서 남긴 아름답고 위대한 삶의 흔적일 것이다.

그들이 살아생전에 다른 이들에게 베푼 것,
고귀한 뜻, 혼을 담은 작품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 가슴을 설레게 하고, 뜨겁게 달구며 긴장하게 한다.

아름다운 그들이 바로 내 앞에 있는 듯하여,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열정적이고도 고귀한 사랑에 빠지게 한다.
내 정신의 다락방에 차곡차곡 쌓여가며 나를 이토록 살아 움직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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