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識]/in 고전·경전

가난해도 즐거운 집, 낙암(樂菴)

그러한 2011. 10. 29. 13:16

 

 

물질만능이라는 오늘날 세상에 안빈낙도(安貧樂道)와 같은 고루한 선비나 할 말을 운운해서는 세정(世情) 모르는 딱한 사람 취급을 받기 십상이리라. 그렇지만 정녕 가난해도 즐거울 수 있다면, 그 즐거움이야말로 외물(外物)에 의해 변치 않는 참된 즐거움이 아닐까. 그런 즐거움을 삶 속에서 찾는 길을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지금의 재미없는 인문학이 참으로 할 만한 학문이 되고, 생기를 잃어가는 인문학이 다시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지난해 사직하고 돌아온 뒤로 겨우 한 차례 사직을 청하여 윤허를 받지 못하고는 성상(聖上)을 번독(煩瀆)할까 몹시 두려워 몸을 사리고 입을 다문 채 올해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마침 나이 일흔이라 치사(致仕)할 시기가 되었기에 감히 성상께 글을 올려 모든 직임을 벗겨줄 것을 청하였으니, 윤허 받지 못할 리 없을 것입니다. 만일 윤허 받지 못한다면 속속 글을 올려 기필코 뜻을 이루고야 말 작정입니다. 명분이 바르고 말이 이치에 맞으니, 성상을 번독할 염려는 생각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이 소원을 이룬다면 산은 더욱 깊어지고 물은 더욱 멀어지며, 글은 더욱 맛이 있고 가난해도 더욱 즐거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滉去年歸後, 僅一辭不得, 極以煩瀆爲恐, 側身緘口, 拖至今年, 適當引年之限, 乃敢上箋陳乞, 理宜無不得者. 萬一不得, 續續拜章, 以得遂爲期. 名正言順, 煩瀆之嫌, 有不當計也. 此願得遂, 意謂山當益深, 水當益遠; 書當益有味, 貧當益可樂也.]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집안에 거처하며 예전에 공부한 글들을 다시 읽으며 이치를 사색하노라니 자못 맛이 있습니다. 이에 고인(古人)들처럼 누추한 집에서 편안히 거처하며 변변찮은 음식을 달게 먹는 것을 거의 바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살고 있는 집이 산기슭에 가깝기에 작은 초암(草庵)을 새로 지어 한가로이 기거할 곳으로 삼고자 합니다. 낙(樂) 자를 이 초암의 이름으로 걸고자 하니, 지난번에 주신 편지에서 “가난해도 더욱 즐거울 수 있으리라” 라고 하신 말씀을 말미암아 제 마음에 바라는 뜻을 깃들인 것입니다. 산은 비록 높지 않으나 시야가 두루 수백 리로 펼쳐져 있어 집이 다 지어져 거처하면 참으로 조용하게 공부하기에 알맞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공부를 하노라면 그 정경(情境)에 절로 일어나는 흥취가 없지 않을 터이니, 이 밖에 세상의 부질없는 일 따위야 무슨 개의할 게 있다고 다시 입에 올리겠습니까.
[歸臥一室, 溫繹陋學, 頗覺有味. 蓬蓽之安ㆍ簞瓢之甘, 亦庶乎可以有望也. 家近山崖, 新築小菴, 擬爲棲遲之所. 欲以樂字揭其名, 蓋緣前書所示貧當益可樂之語, 用寓鄙心之所願慕者. 山雖不深, 眼界周數百里, 屋成而居, 儘合靜修之地. 從事其間, 不無情境助發之趣也. 此外悠悠, 何足介意而更有云云耶?]
 
 
- 이황(李滉)ㆍ기대승(奇大升)  <양선생왕복서(兩先生往復書)> 《고봉집(高峯集)》  

 

 

한국고전번역연구원 누리집(www.itkc.or.kr)에서 가져옴

 

'[앎-識] > in 고전·경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채근담(菜根譚)- 전집 주제어  (0) 2011.11.23
채근담(菜根譚)  (0) 2011.11.23
나 홀로 세상사람들과 달라서  (0) 2011.10.22
노자 도덕경 전문  (0) 2011.07.13
반야심경  (0) 2011.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