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연 속의 다른 개체와 분리된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무한한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의 집합체로서 그 상태는 끝없이 변화한다고 스피노자는 보았다.
그리고 그 변화에 의해 자신의 신체도 변화되는 것의 지각을 기쁨과 슬픔의 정서라고 하고,
인간의 연구는 이성이 아닌 정서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는 것이었다.
인간은 어떤 대상에게 기쁨을 느끼면 그것을 사랑하게 되고, 반면 슬픔을 느끼면 증오하게 되며
이러한 정서로부터 무엇을 하려는 의지인 욕망이 생긴다고 보았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개개인의 욕망과 정서는 다양할 수 밖에 없고 그 일치란 매우 어려운데도,
인간은 타인에게 자신과 동일하기를 욕구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는 자연스러운 일치가 아니라 상상에 의한 일치일 뿐인데도,
자신과 다른 타인의 고유성을 억압하며 증오와 원한을 갖게 된다.
따라서 정서나 욕망이 아닌 이성이 필요해진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말하는 이성은 자신에게 참으로 이익인 것을 추구하고
인간을 진실로 더 큰 완전성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지, 정서나 욕망과 구별되는 절대적인 힘은 아니었다.
즉 개인 간의 대립과 차이에 대한 이해를 돕고 서로 관용하는 공통의 통념이 이성이라고 주장했다.
스피노자는 개념, 이념, 언어와 관련되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간을 구성하는 것이자,
인간이 사회생활에서 만드는 공통의 통념일 뿐이며, 따라서 인간은 삶을 통하여 그러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고,
그러한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삶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사는 지평을 넘어서가 아니라, 타인과 맺는 관용의 관계인 사랑을 통해 가능하다고 믿었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관용의 관계를 조직화하는 것이 윤리적 실천이라고 주장했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타자와 공존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서로의 욕망을 배려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노력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는 선악을 구분하는도덕과는 다르고, 선악이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그는 주장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인간의 삶을 '악'으로 보는 관념에 반대하고,
특히 그것이 절대적인 우월인 '선'을 동경하게 만들어 인간을 도덕의 노예로 타락시키는 것에 반대했다.
- 박홍규, <작은 나라에서 잘사는 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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