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다윗왕이 신하들에게
"싸움에서 승리하였을때, 기쁨에 취해 자만하지 않도록 해 주고,
동시에 절망에 빠져 있을때 수렁에서 건져줄 수 있는 물건"
즉, 마음이 슬플때는 기쁘게, 기쁠 때는 슬프게 만드는 물건을 가져올 것을 명령했습니다.
[단 하나의 글귀]는 자만을 막아야 하며,
[단 하나의 글귀]는 절망도 막아야 합니다.
[단 하나의 글귀]는 경고의 뜻을 담아야 하며,
[단 하나의 글귀]는 격려의 뜻을 담아야 합니다.
[단 하나의 글귀]는 절망을 이야기하면서,
[단 하나의 글귀]는 희망을 함께 이야기해야 합니다.
[단 하나의 글귀]는 no 라고 하는 동시에,
[단 하나의 글귀]는 yes 라고 해야 합니다.
[단 하나의 글귀]는 슬픔을 주어야 하며,
[단 하나의 글귀]는 기쁨을 주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책은 이처럼 물리적 모순과 관련된 상황을 제시하고
선인들이 어떤 해결책을 얻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도 유대교 경전인 미드라쉬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자라면서 이런 것을 보고 배운 아이들과,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차이가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후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실까요?
신하들은 밤새 모여 앉아 토론하였지만 반지에 쓸 글귀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신하들은 다윗 왕의 아들인 지혜로운 솔로몬 왕자에게 상의를 하러 갔습니다.
솔로몬 왕자가 말한 글귀를 새긴 반지가 마침내 왕에게 바쳤습니다.
왕은 반지에 적힌 글귀를 읽고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만족해 했습니다.
반지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또한 곧 지나가리라"
"Soon it shall also come to pass"
동양의 위대한 고전 중 하나인 주역의 기본 사상을 세 글자로 표현하면 "극즉반" 입니다.
아무리 기세가 왕성해 보여도, 달이 차면 기울듯이, 그 기세도 꺽이게 되고,
아무리 초라해 보여도, 그믐 후에는 다시 달이 차는 것처럼, 볕들 날이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라는 것입니다.
다윗왕이 원했던 것은 바로 [극즉반]을 일깨워주는 글귀였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그것을 잊을 것 같을 때 일깨워주는 [단 하나의 글귀].
그러한 것을 생각할 줄 알았던 다윗왕도 다윗왕이지만,
"이 또한 곧 지나가리라"라는 표현으로 다윗왕에게 응대한 신하들의 지혜도
이미 보통 사람의 그것과는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주역이 말하는 [극즉반]의 원리는,
기술 시스템의 생존 곡선인 S-curve 와 S-curve 의 전이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이 [극즉반]은 시스템의 모순이 극히 심화되었을 때 그 모순을 극복하는
새로운 시스템이 출현하는 [정반합]의 변증법적 변이와도 일맥상통합니다.
기술 시스템의 진화는 [정반합]의 변증법적인 절차를 따르며,
영원할 것처럼 한 시대를 풍미한 시스템도 결국 [극즉반]의 이치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다.
동양과 서양은 여기에서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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