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 대한 명상
- 대승집보살학론[대승집보살학론, Siksasamuccaya] 중에서
에드워드 콘쯔
그는 자신의 생각을 찾아 사방을 뒤졌다.
무슨 생각을 찾았을까?
그것은 열렬하거나 혹은 미워하거나 또 혹은 혼란스런 생각일 것이다.
과거의 생각은 지나가 버렸고, 미래의 생각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그리고 현재의 생각은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가섭(迦葉)아,
생각은 안으로도, 밖으로도, 혹은 그 중간으로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생각은 실체가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으며,
저항하지도 않고, 상상할 수도 없으며, 증명되지도 않고,
또한 머무는 곳도 없기 때문이다.
깨달은 사람들 중에서 생각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깨달은 이도 결코 보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
생각은 마치 마법의 환영과 같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상상을 통해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생각은 마치 멈출 힘이 없는 강물의 흐름과 같다.
그것은 생겨나자마자 흩어져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생각은 마치 등잔불의 불꽃과 같고,
그것은 원인과 조건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다.
생각은 마치 번개와 같아, 한 순간에 사라지며 머물지 않는다.
생각을 찾아 사방을 다 뒤져 보지만,
그는 안에서도 밖에서도 그것을 찾지 못한다.
그는 오온(五蘊)이나, 사대요소(四大要素),
혹은 감각 속에서도 그것을 찾지 못한다.
생각을 찾지 못한 그는 생각의 흐름을 찾기 위해 자신에게 묻는다 :
생각은 어디서 생겨나는가? 그리고는 이런 생각을 한다.
'사물이 있는 곳에서 생각이 일어난다.'
그러면 생각과 사물은 다른 것인가?
아니다. 사물이 바로 생각이다.
사물과 생각이 다른 것이면 두 가지 상태의 생각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이 바로 생각인 것이다.
그러면 생각이 생각을 볼 수 있을까?
아니다. 생각은 생각을 볼 수 없다.
칼날이 자신을 벨 수는 없듯이, 마찬가지로 생각은 자신을 볼 수 없다.
더구나 산만하고 잠시도 머물지 못하고
사방으로 내달리는 생각은 원숭이나 혹은 바람과 같아
여섯 가지 감각의 영역 속에서 그것들이 서로 얽혀 있는 가운데,
생각은 먼 곳으로, 형체도 없이, 쉽사리 변하고,
감각의 대상에 동요되면서 헤매다닌다.
안정되고 집중되며 동요하지 않고,
산만하지 않으며, 고요하며, 흩어지지 않은 생각을 한편으로
깨어 있는 마음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