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息]/밑줄 긋기

헤세의 <싯다르타> 중에서 - 3

그러한 2008. 4. 29. 13:32

 

싯다르타는 허리를 굽혀 땅에서 돌을 하나 주워들고 말을 계속 했다.
“여기 돌이 한개 있소.” 이 돌은 어느 시기에 가서는 흙이 될 거요.
그리고 거기 풀이 돋아날 거요. 또 그들은 동물도 되고 사람도 될 거요.

전 같으면 나는 이렇게 말했을 거요. ‘이것은 돌이다. 이것은 아무 가치도 없는 미망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변화의 윤회를 거치는 동안에 이들은 인간도 되고 영혼도 될 것이므로 나는 이들의 가치를 인정한다‘고.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이렇게 생각하오____
이들은 돌이요, 동물이요, 신이요, 부처다. 내가 이 돌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은

앞으로 그것이 어떤 물건이 된다고 해서가 아니라, 영원히, 그리고 언제나 그것이 일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이 시간에 돌로 보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이 돌이 금가고, 움푹 패고, 누런빛과 잿빛을 하고 있고, 딱딱하고, 두들기면 소리가 나고,

표면이 말라 있기도 하고 젖어 있기도 한 그대로의 가치와 의미를 인정하오.

돌 중에는 기름같이 번들번들하거나 비누처럼 미끈미끈한 것도 있소.

어떤 돌은 나뭇잎 같기도 하고, 어떤 돌은 설탕 같기도 하여 각각 독특한 형태로 ‘옴’을 부르고 있소.

모두가 범이요, 동시에 기름 같고 비누 같은 돌이기도 하오.

나는 그 점에 만족스럽고 신기하여 숭배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오.

그러나 거기 대해서는  그만 말하기로 하겠소. 말이란 대체로 내면적인 것을 해치니까요.
우리가 무엇을 말로 표현해 버리면 그것은 그 내용과는 다소 달라지게 되오.

약간 모조품이 되고 미숙하게 되어버리지. 하긴 그것 역시 좋은 일이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보배가 되고 지혜로운 것이 되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는 것도 좋은 일이오. 나는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소.“
고빈다는 잠자코 듣고 있다가 주저하면서 다시 물었다.
“왜 당신은 유독 돌에 대하여 그렇게 말하는 거요?”
“거기 무슨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오. 아마도 내가 돌이건 강이건

우리가 보고 배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고빈다, 한 개의 돌도 그렇게 사랑할 수 있고 한 그루의 나무나 또 나무껍질일지라도 그렇게 사랑할 수 있소.

그것은 ‘물체’요. 인간은 이 ‘물체’를 사랑할 수 있는 거요. 그러나 나는 말을 사랑할 수는 없소.

그것은 모든 가르침이 나에게는 아무 이득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것은 딱딱하지도 연하지도 않고,

빛도 없고, 모나지도 않고, 향기도 맛도 없고, 오직 말일뿐이기 때문이오.

무엇보다도 마음의 평화를 존중하는 당신에게 장애가 되는 것은 아마 그 숱한 말일 거요.

해탈이니 덕이니 윤회니 일반이니 하는 말은 모두가 말에 지나지 않소.

고빈다, 실은 열반이라는 것은 없소. 단지 그 열반이라는 말이 있을 따름이오.“
“싯다르타, 그렇지 않소. 열반은 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상이오.“
고빈다는 이렇게 반박했다.
싯다르타는 말을 계속했다.
“그야 사상일 수 있겠지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사상과 말 사이에 별로 큰 구별을 두지 않소.

그보다는 물체를 더 소중히 생각하오. 이나루터에 나의 선배요, 스승인 사람이 있었소.

그는 오랫동안 단지 강 만을 믿고 그밖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성자였소.

그는 강물이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알고 있었소. 그는 거기서 배우는 점이 많았소.
말하자면 그 강물소리가 그를 길러주고 그를 가르쳐 준 셈이요. 강은 그의 신이었소.

그런데 그는 오랫동안 바람, 구름, 새, 벌레 등 모든 것이 강과 마찬가지로 신성을 갖고 있으며

강과 같이 많이 알고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소.

그러나 이 성자도 산으로 들어갈 무렵에는 그 모든 것을 알게 되었소.

아무튼 그는 강을 믿고 있었으므로 스승도 책도 없이 당신이나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소.“
고빈다는 말했다.
“그런데 당신이 ‘물체’라고 말하는 것은 실존하는 것, 실체를 가리키는 거지요?

그것은 미망이라는 거짓이며, 다만 하나의 환영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소.

돌이나 나무나 강 따위를 실재적인 것으로 볼 수 있소?“
싯다르타는 말했다.
“그것도 역시 나에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소.

만일 물건이 환영에 불과하다면 나도 역시 환영에 지나지 않을 것이오. 그것들은 언제나 나와 같은 것일 테니까.

그러므로 나에게는 그것들이 사랑스럽고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거요.

그렇소, 그것들은 나와 동일하오. 그러니까 사랑할 수 있는 거요.

고빈다, 당신은 웃을지 모르지만 사랑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것이오.

그러나 세상을 경멸하는 것은 사색가가 할 일이오. 그러나 사랑은 세상을 경멸하지 않고 미워하지도 않소.

그것은 오직 사랑할 뿐이오.

세계와 나, 그리고 모든 존재를 사랑하고 경탄하며 존경하는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귀중한 일이오.“

“그것은 나도 알고 있소.”
고빈다는 말했다.
“그러나 불타는 그것을 환각이라고 말씀하셨소.

그분은 호의와 관용과 동정과 인내를 권했으나 사랑은 권하지 않았소.

따라서 그분은 우리가 속세에 대한 사랑에 얽매이는 것을 금하셨소.“
“나도 그것을 알고 있소.”
싯다르타는 웃으며 말했다. 그때 그의 웃음은 실로 눈부시게 빛났다.
“고빈다, 그러나 보시오. 우리도 지금 사상의 동굴에 빠져 말싸움을 위한 말싸움을 하고 있지 않소.

사랑에 대하여 나는 고타마와 분명히 반대되고 모순되는 말을 했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런 말을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오.

그분과 나는 표면상 말에 있어서만 반대될 뿐 나의 견해는 그분과 일치된다고 보오.

모든 인간의 존재를 허무하고 무상하다고 본 나머지 중생을 구제하고 가르치기 위해

오랫동안 괴로운 생애를 보내면서 사람을 사랑한 그분께서 왜 사랑을 몰랐겠소?

그분은 그 위대한 가르침에 있어서도 사실을 말보다 사랑하셨고,

설법보다 행위와 삶을 가치 있게 여기셨으며, 사상보다 손발의 동작을 무겁게 여기신 거요.

나는 그분의 위대함을 사상이나 설법에서 발견한 것이 아니라 행위와 생활에서 발견하게 되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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