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息]/밑줄 긋기

헤세의 <싯다르타> 중에서 - 4

그러한 2008. 4. 29. 13:33

 

 

두 노인은 오랫동안 잠자코 있었다. 이윽고 고빈다는 떠나려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싯다르타, 나는 당신이 갖고 있는 사상의 일부를 말해준 것을 고맙게 생각하오.

그러나 그 사상은 좀 의심스러운 점이 있어 얼른 납득이 가지 않소. 어쨌든 고맙소. 잘 있으시오!“
그러면서 고빈다는 마음 한편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싯다르타는 기인으로 이상한 사상을 갖고 있다. 불타의 가르침 속에는 이상하거나 어리석거나 우스운 것은 없었다.

하긴 싯다르타의 손과 발과 눈. 이마. 호흡. 미소. 인사하는 태도, 걸음걸이 등은 그의 사상과는 달리 아무 이상이 없다.

우리의 세존 고타마가 돌아가신[入寂] 후로는 성자라고 생각할 만한 사람을 아직 만나보지 못했는데,

이 싯다르타에게서 나는 그런 것을 느끼게 된다.

그의 눈동자와 손. 피부. 호흡. 머리. 그리고 모든 면에서 우리 스승이 돌아가신 후로는
아무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순결과 안식의 빛을 발산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한 고빈다는 마음속에 모순을 느끼면서도

그 사랑에 이끌려 조용히 앉아 있는 싯다르타에게 다시 한번 공손히 인사를 했다.
“싯다르타!”
고빈다가 불렀다.
“우리는 벌써 늙은이가 다 되어 살아생전에 다시는 만나기 어려울 것 같소.
당신은 마음의 평화를 찾았구려. 그러나 나는 아직 그렇지 못하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한마디만 더 해주시오. 떠나가는 나그네 길에 이로울 말이 없겠소?

앞길은 외롭고 캄캄하기만 하오, 싯다르타!“
싯다르타는 잠자코 잔잔한 웃음을 머금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고빈다는 불안과 동경이 엇갈린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영원히 구하여도 구할 길이 없는 번뇌와 갈망이 서려있었다.
싯다르타는 그것을 보자 다시 빙그레 웃어 보였다.
“나한테로 몸을 굽히시오!”
싯다르타는 그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이리로 좀더 가까이 굽히시오, 바싹 가까이, 그리고 내 이마에 키스를 하오. 고빈다!”
고빈다는 좀 의아스럽게 생각하면서도 그에 대한 사랑과, 또 일종의 호기심에 이끌려

그에게 가까이 몸을 굽혀 이마에 입술을 댔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의 머리에서는 아직도 싯다르타의 이상한 말이 떠나지 않고 있으며,

시간을 초월하여 열반과 윤회를 하나로 생각하려고 부질없이 애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에대한 경멸과 그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이 엇갈려 싸우고 있는데, 실로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싯다르타의 얼굴은 온 데 간 데 없고 그 대신 다른 사람들의 얼굴들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그 많은 얼굴들은 있는가 하면 없어지고 없어졌는가 하면 곧 다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 많은 얼굴들은 변모하여 새로운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그 모든 얼굴은 역시 분명히 싯다르타의 얼굴이었다.
그는 잉어의 얼굴을 보았다. 막 죽어가는 그 얼굴은 무척 괴로운 듯이 입을 딱 벌리고 눈빛은 흐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태어나 주름잡힌 얼굴로 울고 있는 어린애의 얼굴도 보았다.

단도로 사람의 배를 찌르는 살인자의 얼굴도 보았다.

그러나 이 죄인은 꽁꽁 묶여 끊어 앉더니 망나니의 칼에 목이 달아나는 것이었다.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남녀의 벌거벗은 몸뚱이도 보았고, 사지를 뻗고 누워있는
공허하고 차디찬 시체도 보았으며, 동물의 머리들, 수퇘지와 새들의 머리도 보았다.
또한 신들도 보았다. 크리슈나와 아그니신이었다.
이 모든 얼굴과 형체들은 서로 천자만태로 얽힌 채 각각 다른 얼굴과 형체를 돕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하고, 새로 낳기도 하고, 죽어가기도 하는

허망한 세계에서 지독한 시달림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도 죽지는 않고 다만 형체가 변모되어 갈 뿐, 언제나 새로 거듭하고 새로운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한 형체와 다른 형체 사이의 변모에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니었다. 모든 것은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 모든 형체와 얼굴들은 휴식하기도 하고 생각하기도 하고 헤엄치기도 하며 서로 엉키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위에 엷고 가벼운 그 무엇이 언제나 덮여 있었다.

그것은 엷은 유리 같기도 하고 얼음 같기도 하며, 투명한 막 같기도 하고 물로 만든 가면 같기도 했다.

그 가면은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가면은 싯다르타의 웃는 얼굴이었다. 또한 고빈다는 보았다,

유전하는 무수한 형체 위에 일관된 수천의 미소와 삶과 죽음을 초월한 동시성의 미소와 가면의 웃음을.
이 싯다르타의 웃음은 바로 저 고타마의 웃음이었다. 자기가 무한히 존경하며 우러러보던,

조용하고 명랑하며, 헤아릴 수 없이 자비로운가 하면 조소하는 것 같기도 한 현명한 불타의 수천가지 웃음이었다.

그리하여 고빈다는 여기서 인격이 완성된 자는 미소짓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시간이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며, 이 관찰이 순간적인 일이었는지 백년간의 일이었는지도 알지 못하고,

그것이 싯다르타인지 고타마인지도 모르며, 또한 거기 내가 있는지 네가 있는지도 모른 채

신의 화살에 가슴을 맞고도 아프지 않고 달콤함을 느끼는 사람처럼 마음이 황홀하게 해탈된 고빈다는

잠시 그대로 서서 고요한 싯다르타의 얼굴을 굽어보고 있었다.
지금 방금 입을 맞춘, 모든 형체와 모든 생성과 모든 존재의 무대이던 고요한 그 얼굴,

천태만상의 막이 표면에서 다시 사라지자 그의 얼굴은 전과 같았다.
싯다르타는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는 은밀히 웃었다. 자비롭고 조롱에 가득 찬 얼굴로 마치 불타처럼 웃었다.
고빈다는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눈에서는 영문 모를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의 노쇠한 얼굴에는 가장 깊은 사랑과 충성심에서 우러나는 겸허한 존경의 빛이 불타고 있었다.

그는 잠자코 앉아 있는 싯다르타 앞에 이마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굽혀 또 절을 했다.

싯다르타의 웃음은 고빈다에게 일찍이 그가 긴 생애 동안 사랑해 오던 모든 것을,

그의 생애에 일찍이 가치 있었고 거룩하게 생각해 오던 모든 것을 회상시켜 주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