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자유인, 크리슈나무르티 | |||||||||
당신은 진정으로 변하고 싶은가? | |||||||||
글│김정우 (정신세계 2000년 8 월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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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슈나무르티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지도 필자의 기억으로 어언 20년이 넘었다. 그동안 우리말로 번역되어 출간된 그의 책만도 40여 종에 이르고, 각종 매체를 통해서 그의 생애나 사상의 일단을 소개한 글까지 합치면 적지 않은 양이 될 것이다. 이쯤 되면 정신세계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물론, 그런 데에 별반 관심이 없는 보통 사람들이라도 크리슈나무르티라는 이름 정도는 언젠가 들어본 듯도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삼 크리슈나무르티의 이력이나 연대기를 소개하는 일은 그다지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한’ 소개가 아니고, 그를 이해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진리로 가는 길은 따로 없다 크리슈나무르티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그에 관한 전기까지 집필했던 메리 루틴스에게, 어느 날 누군가가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을 간단한 몇 마디로 요약해 달라고 했다. 그에 대한 답변이 「K 가르침의 핵심 The Core of Krishnamurti’s Teaching」이라는 다음과 같은 짤막한 글로 나타나 있다. 크리슈나무르티가 평생 동안 행한 가르침의 알짜는 1929년에 「별의 교단」을 해체하면서 남긴 ‘진리로 가는 길은 따로 없다’는 말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 거울에 스스로를 비추어보고, 자기 마음에 담긴 내용물을 하나하나 이해하면서, 우리는 그 ‘진리’라는 상태를 스스로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지요 (…) 또한 개인의 진정한 의미는 피상적인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내용물에서 벗어나는 전면적인 자유에 있는 것입니다. 자유란 반작용도 아니고, 선택도 아닙니다. 자유는 인간이 거쳐온 진화의 종착역이 아니라, 존재의 첫 단계입니다. 순수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자유가 없다는 사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게 되지요. 자유는 일상생활을 꾸려나가는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일인 것입니다 (…) 그리고 자기 의식이 움직이는 모습을 알아차리고, 과거의 그림자를 말끔히 걷어버리는 것이 가능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야말로 긍정의 핵심입니다. 사랑이 아닌 모든 것, 이를테면 욕망과 쾌감과 질투를 모조리 던져버리고 나면, 언제 찾아왔는지 모르게 자비와 지혜를 듬뿍 안은 사랑이 그 자리에 들어서 있을 것입니다. 『Total Freedom : The Essential Krishnamurti 』중에서 개인적으로 16년 동안, 서른 권이 넘는 그의 저서와 테이프를 읽고 보고 듣고, 그 가운데 열 권이 넘는 책을 직접 번역했어도, 이 이상 여기에 덧붙일 수 있는 말은 없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크리슈나무르티가 60여 년 동안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그곳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도 한결같다. 여기서 더 이상 벗어나지 않는다. 똑같은 이야기, 그리 길지도 않은 이야기를 그토록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에게 전하려했다는 사실도 놀랍거니와,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를 그토록 오래도록 들어왔으면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완전한 ‘의식의 혁명’이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놀랍다. 그러니까 여전히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은 이해가 되지 않은 미해결의 가르침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의 메시지가 그렇게도 어려운가! 그토록 오래도록 들어왔으면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완전한 ‘의식의 혁명’이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 때문일까?” 그를 이해하는 특별한 방법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은 간단하고 쉽지만, 또 한편으로 어렵고 엄격하다. 어떤 이들은 아스트랄체니 멘탈체니 하면서 우리의 정신세계를 조리 있게 나누고, 또 다른 이들은 전생을 들먹이면서 초월 세계나 영계의 모습을 입이 닳도록설명해준다. 일상적인 감각 세계를 벗어난 차원을 일일이 보여주고 설명하자니 말도 자연 길어지고 용어도 화려해질 수밖에 더 있겠는가? 그렇지만 누군가가 앞에 서서 우리가 알고 싶은 내용을 하나씩 풀어놓으니, 듣는 이나 보는 이는 참으로 편하다. 그냥 앉아서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고 자기만족을 얻어가면 그뿐, 아무도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는다(물론 그런 가운데서 개인적인 신비한 체험을 하고 색다른 차원에 들어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크리슈나무르티는 그런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는다. 대신에 지금 우리가 당장 안고 있는 사소한 문제를 이야깃거리로 삼는다. 여기 오기 전에 집을 나서면서 아내에게 화를 낸 일이 왜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 찜찜하게 남아 있는지, 그만한 일도 못 참고 화를 낸 내가 과연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왜 이렇게 번번이 감정을 참지 못하고 화를 내고 나중에는 후회하고 하는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는지, 그 문제의 바닥을 보라고 말한다. 다루는 내용이 이러니 구태여 어려운 용어를 쓸 필요도 없고 장황하게 설명할 일도 없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가 중요하다.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을 잘 들어 보라. 처음에는 문제의 바닥을 보라고 잔잔하게 부탁하다가, 이야기가 본궤도에 오르면 지금 당장 보라고 다그친다. 지금 당장이다! 정작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내용은 말하지 않고, 시시해 보이는 이야기를 두고 지금 당장 직접 체험해보라고 우리를 몰아세운다. 그러니까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은 그냥 편하게 듣는 이야기가 아니다. 들으면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이야기이다. 그의 말은 이처럼 쉽고 간단하지만(우리의 일상적인 문제란 그 뿌리가 공통적인 것이 많다!), 우리는 선뜻 이해의 문을 열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말은 받아들이기 힘들고 이해하기 어렵다. 내년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한 시간 있다가도 안 된다! 지금 당장 문제의 뿌리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 안 보면 영원히 볼 수 없다! 따라서 그의 말은, 들으면서 이해하고 그 즉시로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안 되는 지극히 엄격한 이야기이다. 빙산의 일각, 나머지는 우리의 몫이다! 결국 우리는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을 귀로 듣거나 글을 책으로 읽으면서 언어의 속임수를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그가 자유와 사랑과 지성과 창조와 진리와 명상과 감수성과 시간과 배움에 대해서 행한 말을 백 퍼센트 완전무결하게 이해했다고 해도, 당사자가 실제로 달라지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런 사람들은 설령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을 가지고 사람들을 모으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을지 몰라도,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고 이웃의 성공을 질투하지 않고 공통의 행복으로 느끼지 못하는 한, 그가 읽은 크리슈나무르티는 전혀 무의미하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제대로 이해하여 행동으로 옮겼을 때 나타나는 변화는 실로 엄청나다(물론 이 부분은 전적으로 개인의 체험으로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 이제 구분은 확연해졌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빙산 전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빙산의 일각(一角)만을 보여주면서 나머지 구각(九角)은 우리더러 직접 체험하라고, 체험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열 가운데 아홉이 우리의 몫인 만큼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한 이해는 당사자의 수준에 따라 지극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서두에 적은 루틴스의 이야기가 너무 압축되어 있어서 불만스러운 독자들을 위해서 지금부터 여기에 조금의 사족을 덧붙여보기로 한다(앞서도 언급했듯이 이는 전적으로 필자의 현재 수준에서 크리슈나무르티를 이해하고 있는 내용이므로, 크리슈나무르티를 읽은 한 개인의 작은 체험일 뿐이다). 빙산의 일각(一角)만을 보여주면서 나머지 구각(九角)은 우리더러 직접 체험하라고, 체험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냥개한테 쫓기는 짐승은 생각이 저지른 일 지금 ‘내’ 모습은 어떠한가? 겉모습은 눈에 다 보이니 안을 한번 들여다보자. 지금보다 더 부유해지고 싶고, 남들이 알아주는 업적도 남기고 싶고, 가족 서로에게 불만이 없는 화목한 집안도 만들고 싶다. 돈? 정당한 노력으로 벌어들인 돈만이 의미 있는 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어디서 불로소득이라도 좀 안 생기나 하고 주변을 기웃거린다. 화목한 집안을 만들려면 부모님께도 잘하고 아내나 아이한테도 잘해야 하는데, 다 잘하기가 어디 쉽겠느냐고 핑계를 대면서 자꾸만 편한 쪽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결국 잘 들여다보니 내 안은 모든 분야에서 생각이 둘로 나뉘어 있다. 편의상 이 둘을 ‘이상’과 ‘현실’이라고 불러보자. 그럼, 이 둘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다시 좀 더 지켜보자. 어떤 문제든 처음에는 ‘바람직한’ 생각대로 움직이려고 마음을 먹는데도 결국 행동은 ‘현실적인’ 생각을 좇아서 움직이게 되고 만다. 모든 문제가 다 그런 식으로 결론이 나고 만다. ‘이상적인’ 생각이 조금 고개를 들라치면 ‘치사하지만 현실적인’ 생각이 곧바로 뒤를 쫓아와서 어느 틈엔가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고 말지 않았는가! 마치 사냥개한테 쫓기는 짐승의 가련한 형국이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이다. 사냥개가 짐승을 쫓아와서 물어뜯은 것까지는 그렇다 치고, 그렇더라도 마음만 편하면 그뿐인데,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다. ‘그래도 그게 아니었는데’라는 후회 비슷한 감정이 슬며시 비집고 들어오니 말이다. 그럼, 다시 한번 따져 보자. 우리 마음속에서 한바탕 쫓고 쫓기는 사냥개는 무엇이고 짐승은 또 무엇인가? 그 가련한 짐승은 본디 선하다고 항상 여겨온 ‘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나를 ‘치사하지만 현실적인’ 행동을 하도록 사사건건 몰아세우는가? 사회 때문인가, 부모 때문인가, 자식 때문인가, 돈 때문인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정말 무엇 때문인가? 사회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고, 자식도 아니고, 돈도 아니다. 사회라는, 부모라는, 자식이라는, 돈이라는 핑계거리를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다가 적당한 때 써먹는 ‘생각의 구조 전체’가 바로 사냥개인 것이다. 결국 내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생각의 전체 구조’라는 사냥개가 ‘나’라는 짐승을 쫓고 있는 셈인데, 다시 잘 따져보자. ‘나’와 내가 하는 ‘생각’은 과연 다른 것인가? 생각과 같이 행동하는 내가 되기 위하여 ‘나’와 내가 하는 ‘생각’은 절대 다르지 않다. 다를 수가 없다.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은 여기까지이다. 그 다음부터는 직접 우리가 보고 느껴야 하는 체험의 영역이다. ‘나’와 내 ‘생각’이 다르지 않음을 직접 보았다면 그 순간 ‘나’도 없어지고 ‘생각의 구조’도 해체되고, 오직 떠다니는 생각만 남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내’가 ‘나의 생각’을 바라보는 상태가 아니라, 무수한 ‘생각’들만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져 버린다. 이 상태를 크리슈나무르티는 ‘알아차리게 된다’고 말한다(고맙게도 우리말에는 이럴 때 편리하게 쓸 수 있도록 주어가 없어도 되는 자연스러운 문장 형식이 있다). 그때 보통의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욕심과 야망과 게으름으로 점철되어 있는 자기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느낌이 어떻겠는가? 그야말로 오싹 소름이 끼칠 것이다. 그럼, 그 다음 단계는? 자기 발 밑에 무시무시한 뱀이 기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 그대로 밟는 사람이 있겠는가? 당연히 발을 비켜서 땅바닥을 디딜 것이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소름이 끼치도록 추악한 자기의 참모습을 속속들이 본 사람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계속 자기 안에 담아둘 수 있겠는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떨어져나가고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 번 알아차렸다고 해서 만사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생각이 무수한 만큼 그 생각을 모두 떨어버리려면 우리는 그 생각들을 끊임없이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물론 운전을 하고 컴퓨터를 움직이는 기계적인 생각까지 없앤다는 뜻은 아니다). 이때, 우리는 순간마다 낡은 생각이 죽고 그 자리에 새로운 ‘그 무엇’이 들어서는 탄생의 광경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하는 명상의 참된 의미이다. ‘나’와 ‘생각’이 다르지 않고, 결국 ‘나’란 존재하지 않는 허구라는 사실이 체득되었을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크리슈나무르티가 힘주어 말하는 참된 사랑과 참된 자유와 참된 지성의 의미를 알게 된다. 그것들은 모두 ‘나’가 사라진 상태에서 저절로 나타나는 새로운 생명체의 다른 이름이다. 결국 사냥개와 짐승은 생각이 벌인 자기 유희였다. 다만 갈등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가 깜빡 속고 또 속았던 것이다. 사냥개와 짐승이 하나이듯이, 관찰자와 관찰 대상도 하나요, 경험자와 경험도 하나요, 의식과 의식의 내용물도 하나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크리슈나무르티 사상의 핵심인 동시에, 우리의 직접적인 체험을 요구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간단해 보이는 몇 마디 결론이지만) 이해하기에 가장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Seeing is acti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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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정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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