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인간의 앎에는 두 가지 길이 있고, 자연에 대한 해석에 또한 두 가지 길이 있는데,
이 두 가지가 구별이 안되고 혼동된다는 데 있다.
그 두가지란 무분별의 예지와 분별의 지혜다.
무분별의 예지는 분별에 의하지 않고 직관으로 인식하는 방법 이외에는 달리 길이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관념적으로 인정되고 있을 뿐 실제로는 무시되고 있는 지혜다.
인간은 분별에 의해서만 정확한 인식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세간에서 통용되고 있는 앎은 어느 것이나 분별지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일반인들이 말하는 자연이란 모두 분별지에 따라 파악된 자연에 불과하다.
이 두가지 지혜는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전자는 부정되고 후자만이 긍정되며 위세를 누려왔다.
인간의 분별지는 자연을 떠난 인간만의 것으로 앎은 앎을 낳으며 발달하지만,
홀로 걷기를 하기 때문에 고독한, 이정표가 없는 끝도 없는 길을 방황하게 될 뿐이다.
인간의 지혜는 절대적 인식이 아니다.
인간의 지혜는 자연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 채 가짜 자연을 붙잡고 그것을 자연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의 앎은 영원히 불완전하며 부자연한 앎으로서의 운명을 면할 수가 없다.
그것은 인간을 혼돈의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빠뜨릴 뿐이다.
내가 무분별의 지혜를 좋아하고 분별지를 싫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는 무분별의 예지로써 인식한 자연을 진짜 자연이라고 하고,
인간이 만들어낸 분별지에 의한 자연을 허상의 자연이라고 하여,
양자를 명확히 구별하며, 후자인 분별지를 부정한다.
이 허상의 자연, 자연이 아닌 것 일체를 배제함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혼란을 그 바탕으로부터 제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 후쿠오카 마사노부, <짚 한오라기의 혁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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