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을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생각이 많아지게 된다.
물론 지금의 세상 자체가 지나치게 '생각', '지식'에 대한 탐욕을 부채질 하는 구조에 있다.
눈 돌릴 꺼리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중심이 '나' 가 되어야한다는 생각이 뿌리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행의 중심도 '행' 이 아니라 '나' , 자비의 중심도 '자비' 가 아닌 '나' 가 되어버린다.
암튼, 생각이 깊어지는 것과 생각이 많아지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아무리 훌륭한 생각도 그것이 생각이면 그것은 그저 생각일 뿐이다.
진리는 사실이며 실재지 생각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이 많아지는 것을 생각이 깊어지는 것이라고 자주 착각하게 된다.
사랑과 탐욕의 차이를 거의 구분하지 못하며
지혜와 분별의 차이를 거의 구분하지 못하며
무심과 방관의 차이를 거의 구분하지 못하며
깊음과 많음의 차이를 거의 구분하지 못하며
어리석음과 무분별의 차이를 거의 구분하지 못한다.
꼭 수행이 아니더라도 지금 사람들은 예외없이 생각이 참 많다.
크게 세부류로 나눠보려 한다.
1. 어리석게 생각이 많기만 한 타입.
2. 탐욕스럽게 생각이 많아지는 타입.
3. 냉소적으로 생각이 많은 타입.
첫번째 유형은 말 그대로 어리석어서 생각의 번잡스러움을 즐기는 타입이다.
그 번잡과 혼란을 진지함과 심도 깊은 사고라고 착각하는 부류.
그들의 판단은 대개 오판으로 이어진다.
두번째 유형은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생각을 이용하길 즐기는 타입이다.
나름대로 구체적으로 자신의 생각이 옮음을 주장하기도 하고,
간혹 얼핏 굉장히 타당성 있기도 한 것 같지만,
본질에대한 접근이나 해결이 아닌 그저 겉 표면을 �아대고 있는 부류.
탐욕이 강한 만큼 자신의 생각에대한 자아도취가 강하고,
그 탐욕으로 이해 별 근거없는 자기 확신이 강하다.
그러면서도 그 탐욕이 좀 더 나은 자신의 모습을 꿈꾸며 열등감도 상당히 팽배하게 하는,
그래서 우월감과 열등감을 큰 폭으로 오락가락하는 행태를 띈다.
자신이 열등하다고 느끼는 것도 상대와 비교우위적인 자신에대한 사랑때문이며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끼는 것도 상대와 비교우위적인 자신에대한 사랑때문이다.
우울도 탐욕이 되고, 슬픔도 탐욕이 되고, 유쾌함도 탐욕이 됨으로
상대로 하여금 맑고 투명한 밝음이 아니라 다소 탐욕스러운 밝음이 되기 십상이다.
세번째 유형은 비교적 생각이 예리한 편이다.
왜냐면 거의 모든 것을 예외없이 공평()하게 싫어하고 허물을 들추기 즐기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대신 애정이 없어 가장 가까이 하는 것이 피곤한 부류다.
나 같은 타입이지. ^^
첫번째 타입은 경박하며 다소 정신이 없는 게 특징이고
두번째 타입은 언뜻 관대한 듯 하나 본질적으로 탐욕과 허영을 가진 게 특징이고
세번째 타입은 건방지고 불만이 많은 게 특징이다.
세번째 타입은 수행 자체가 빠르나 자비로워지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고
두번째 타입은 수행 자체도 중간, 자비로워지데 걸리는 시간도 중간,
첫번째 타입은 수행은 느리나 자비로워지는데 걸리는 시간이 많지 않다.
그러니 다 일장일단이 있는거지만,
두번째 타입이 수행하는데 있어서는 가장 애매보호하며 좀처럼 성과를 얻기가 어려울 타입이다.
모두에게 속하는 공통점이 있는데,
생각이 많아지는 것 자체가 필연적으로 탐욕으로 변질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집과 자만이 강해진다는 것이며,
뭔가를 많이 알고 있고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그것을 하나의 '힘'으로 착각하며
쓸데없고 어리석은 권위의식으로 변질된다.
많은 생각을 스스로 엄청나게 지적이고 지혜롭다 착각하며
타인과의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권위감에 도취되기 쉽다는 말이다.
그래서
많아진 생각을 단순하고 소박하게 해서 깊어지게 할 방법과
많아진 생각으로 인한 그 권위감과 자신감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늘 동시에 염두에 둬야만 한다.
그 두가지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의외로 하나다.
간단히 말해서 '사랑; 자비' 이며
다양하게 말해서 사람의 성향에 따라 포용, 공경, 배려, 존중, 단정, 겸손, 인내, 사려, 명랑,...등등이 되는 거다.
물론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며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성균이는 공경이 수행 주제가 되었고, 영옥이는 포용이 수행 주제가 되었다.
우리 신랑은 기품보다는 겸손, 겸허 가 되었으면 좋겠다.)
자만심에 근거한 사랑, 자비는 상대로 하여금 거부감을 준다.
그게 비록 상대가 의식하지 못한 것이라 할 지라도
근원적으로 에고가 사라지지 못한 상태에서의 애정이란
상대로 하여금 무의식적인 저항과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상대를 자신에게 동화, 공감시키지 못한다.
( 나 같이 무의식의 바닥까지 허물을 들추는 타입을 만나면 골치 아픈 거지.-.-;; )
사랑은 철저히 '나' 쪽이 비워지고 낮아지는데 있다.
내가 비워지고 낮아져서 저절로 채워지는 물과 같은 것이다.
그 사랑에는 그 어떤 저항도 거부도 없다.
단지 함께 흐르며 함께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암튼, 허물을 미움으로써 보지 않고, 사랑으로 보며 감싸주고 덮어줄 수 있는
'포용'의 진정한 묘용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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