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識]/on 명상

미움도 사랑의 다른 이름

그러한 2008. 4. 29. 13:35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할 수 없다면 그 사랑에는 긴장이 없을 것이고, 그 사랑은 죽은 사랑이 될 것이다.

다양성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정체될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대는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 그런데 아침에는 물밀듯이 솟아나던 사랑이 저녁때에는 미움이 된다.

왜 그런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왜 삶은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것일까?

미워할 때에는 두 사람이 분리된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거리감이 생겨난다.
사랑에 빠지기 전에 두 사람은 별개의 개인이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짐으로써 그들은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공동체가 되었다.


미움에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미움을 통해 사랑을 얻는다.

화를 내는 것은 아무 잘못도 없다. 우리는 분노를 통해 고요한 평화에 도달한다.

삶은 변화한다.  변화만이 영원하다." 변화만이 변하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것은 변한다.

나는 영원한 순환을 믿는다. 모든 것이 순환한다. 그것이 만물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곧 '되어 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대가 지금과 같은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움직이는 과정을 뜻한다. 그대는 한 곳에 머물 수 없다. 아무 것도 정체되어 있지 않다


드러난 것보다 숨은 조화가 훨씬 낫다. 대립은 화합을 가져오고 불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생겨난다.

만물은 변화 속에서 안식을 발견하나니. 자신과 불화를 이루는 것이 어떻게 자신과 일치되는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수금(竪琴)과 활의 경우처럼 구부러진 등에도 조화는 있다. 활의 이름은 삶이지만 그 일은 죽음이다.
-헤라클레이토스-

태양이 환히 빛나고 있다. 그런데 그대는 눈을 감고 서서 태양이 어둡다고 말한다.

때로는 태양 앞에 눈을 뜨고 서 있는데도 빛이 너무 강해서 일시적으로 눈이 멀어 버리는 수가 있다. 빛을 견디기 힘들다.
이때 갑자기 어둠이 밀려온다. 눈이 열려 있고 태양이 저기 있어도 빛이 너무 강렬해서 어둠을 느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두 개의 독립된 현상이 아니다. 그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깊이 들여다보면,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이다.
그대는 태어나는 순간 이미 죽기 시작했다. 이런 식이라면 그대는 죽을 때 다시 살기 시작할 것이다.
삶이 죽음을 함축하고 있다면 죽음은 삶을 함축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귀속된다. 그들은 상호 보완적이다

봉우리가 아름다운 것은 계곡이 있기 때문이다. 계곡으로 다시 내려올 수 없다면 그대의 정상은 아무 가치도 없다.

그것은 이미 정상이 아니다. 봉우리에 집을 짓고 산다면 그대는 그곳이 봉우리라는 것을 잊어버릴 것이다.

사랑이라는 봉우리의 아름다움이 사라진다.

아침에 사랑으로 충만하던 그대가 오후가 되면 미움으로 가득 찬다. 이제 그대는 계곡으로 이동했다.

사랑에 빠지기 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이제 두 사람은 다시 별개의 개인이 되었다. 개인이 되는 것은 아름답다.

거기엔 자유가 있다. 계곡에 사는 것 또한 아름답다. 그 곳에는 휴식이 있다. 어두운 골짜기에는 편안한 휴식이 있다.

그것이 다시 균형을 회복하는데 도움을 준다. 미움의 순간이 지나고 다시 사랑에 빠졌을 때 새로운 허니문(honeymoon)이 시작된다.

아무런 변화도 없다면 삶은 고여 있는 연못과 같다. 그대가 반대 극으로 움직일 수 없다면 모든 것이 진부하고 지루해진다.

지나치게 세련되고 개화된 사람들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항상 웃는다. 결코 화내는 법이 없다.

그들은 모욕을 당해도 웃고, 칭찬을 해도 웃고, 비난을 해도 웃는다. 이런 그들의 모습은 역겹다. 그들의 웃음은 위험하다.

거기엔 깊이가 없다. 다만 입술 위에 머무는 표정, 작위적인 표정이 있을 뿐이다. 실제로 그들은 웃는 것이 아니다.

규범과 형식을 따를 뿐이다. 그들의 웃음은 추하다.

항상 사랑하면서 미움을 모르는 사람들, 화내지 않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매우 표피적이다.

반대극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깊이를 얻겠는가? 깊이는 반대극으로의 이동을 통해서 온다. 사랑은 미움이다.

사실, 사랑과 미움이라는 단어를 따로 써서는 안된다. 우리는 '사랑미움'이라는 한 단어를 써야 한다.

사랑의 관계는 곧 사랑미움의 관계이다. 이것은 아름다운 현상이다.

신비적인 통찰력을 얻은 사람에게 이 모순은 참으로 아름답게 보인다. 아름다움은 모순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집착하지 말라. 집착하면 스스로 지옥을 만든다.

집착이 지옥이다. 집착 없는 의식은 항상 천국에 산다. 기분과 함께 움직여라. 기분을 받아들여라. 변화를 수용하라.

그러면 불평 불만이 있을 수 없다. 삶이란 본래 그렇게 변화는 법이다. 만물이 그런 식으로 존재한다.

아무리 대항해도 '변화'라는 삶의 법칙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그대의 변화하는 자아에 충실하라. 그것이 유일한 실체다. 붓다가 자아는 없다고 말한 까닭이 그것이다.

그대는 흐르는 강이다. 고정된 자아는 없다. 그대 안에서 불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붓다는 인도에서 추방당했다. 왜냐하면 인도인들, 특히 브라민과 힌두교인들은 아트만(ataman)이라는 영원한 자아를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원한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붓다는 오직 변화만이 영원하며, 그 외에 아무 것도 영원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대는 왜 영원한 것이 되려고 하는가? 왜 죽은 사물이 되려고 하는가? 죽은 것만이 영원하다. 파도가 오고 간다.

이런 양극성을 관찰해 본 적이 있는가? 일과 휴식은 대립된다. 열심히 일할 때 그대는 긴장한다. 지치고 피곤해진다.

이때 그대는 깊은 휴식의 골짜기, 잠 속으로 들어간다. 표면이 멀어지고 그대는 중심으로 들어간다.

그대는 더 이상 표면과 동일시되어 있지 않다. 이름이나 에고와 하나가 되지 않는다. 표면에 있던 모든 것이 멀어진다.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어버린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다시 신선해진다. 이 망각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이 망각이 활력을 불어넣는다.

3주만 잠을 자지 않으려고 노력해 보라. 그대는 미쳐 버릴 것이다. 반대 극으로 이동하는 법을 잊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그대는 잘 해 나간다. 그러나 이것은 도움이 안된다. 표면적인 모습에 연연하지 말라. 더 깊이 들어가라.

대립되는 것 사이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려고 하지 말라. 그대를 양쪽 모두를 살아야 한다.

어느 쪽에도 집착하지 않고 양쪽 모두를 살 수 있다면,

사랑하면서도 주시자로 남고, 미워하면서도 주시자로 남을 수 있다면, 이 주시가 숨은 조화를 이룰 것이다.

이때 그대는 사랑과 미움이 변화무쌍한 기분일 뿐이며 계절처럼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이 상반되는 것들 안에서 게쉬탈트(gestalt)를 볼 것이다.

게임에는 대립이 있다. 그러나 깊은 곳에는 여전히 화합이 존재한다. 게임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대립과
조화 둘 다 필요하다.

만일 절대적인 조화만 있고 대립이 없다면 게임은 중단될 것이다. 누구와 게임을 벌일 것인가?

반면, 절대적인 불화와 대립만 있고 조화가 없다면 이 경우 또한 게임이 중단될 것이다.
불화 속의 조화, 대립 속의 합일이 모든 신비의 열쇠다.

만물은 변화 속에서 안식을 발견하나니.
자신과 불화를 이루는 것이 어떻게 자신과 일치되는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악마는 신과 일치하고, 신은 악마와 일치한다. 이것이 악마가 존재하는 이유다.

대립은 화합을 가져오고 불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비롯되나니......
활의 이름은 삶이지만 그 일은 죽음이다.

죽음이 삶의 일이다. 삶의 최종적인 결과가 죽음이다. 죽음과 삶은 둘이 아니다.

활의 이름은 삶이지만 그 일은 죽음이다.


<오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