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은 늘 새롭다.
그것은 아무런 연속성도 없으며,
그 때문에 과거는 명상 위에 아무런 그림자도 던지지 않는다.
<새롭다>는 말은 일찌기 없었던 청신한 숨결을 전달하지 않는다.
그것은 꺼진 위에 다시 켜지는 촛불과도 같은 것이다.
초는 마찬가지이지만, 새로운 빛은 먼저의 것과 같지가 않다.
명상에 지속성을 부여하려고 하는 것은 사고이며,
그것은 명상을 채색하여 날조하고, 거기에 목적을 부여하려고 애를 쓴다.
사고에 의해 부여된 명상의 목적과 의미는 시간의 속박 속에 빠져 버린다.
그러나 사고에 의해 접촉되어 있지 않는 명상은
시간을 초월한 그 자체의 운동을 전개한다.
시간이란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으로,
어제를 뿌리로 삼아 내일로 흐르는 일련의 운동이다.
그러나 명상의 개화(開花)는 그것과는 전혀 이질적이다.
그것은 어제의 경험에서 생긴 것이 아니며,
그 때문에 하등 시간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있다.
그 연속성은 시간의 테두리 바깥에 있다.
그러나 명상에 관해 연속성이란 어귀를 사용함은 오해를 초래한다.
왜냐하면 이미 과거의 것이 되어 버린 어제는
결코 오늘에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의 명상은 새로운 각성이며 선성(善性)인 아름다움이 새로 개화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