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은 축복의 각성이다.
그것은 오감의 깨달음인 동시에 그것들을 초월하는 것이다.
시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어떠한 연속성도 없다.
인간관계에서 우러나오는 행복이나 기쁨,
대지 위로 흘러가는 구름의 모습, 나뭇잎 위로 쏟아져내리는 봄빛,
그것들은 사람의 눈과 정신을 즐겁게 해준다.
이 기쁨은 사고에 의해서 생겨나고 기억의 영역 속에서 지속성을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감의 강렬성을 수반하는 명상의 축복이 아니다.
오감은 사고나 순응을 요구하는 규율, 사회, 도덕 등에 의해 비뚤어지는 일이 없이
예민하게 작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감의 자유, 그것들은 결코 방종으로 흐르는 일이 없다.
--- 방종이란 사고에 뿌리내린 쾌락에 불과한 것이다.
사고를 불에 대한 연기 같은 것으로 본다면,
축복은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자욱한 연기를 뿜지 않는 불꽃 같은 것이다.
쾌락과 축복은 결국 아무 관계가 없다.
쾌락은 사고의 노예이지만, 축복은 사고를 초월하고 있다.
명상의 기반은, 사고와 쾌락을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도덕이나 규율과 함께 이해하는 곳에 있다.
명상의 축복에는 시간이나 지속성이 없다.
그것은 모든 것을 초월해 있고 그 때문에 헤아리기 어렵다.
그 환희는 보는 자의 개별적인 눈으로 포착되는 것도 아니고,
생각하는 자에게 경험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말로써는, 혹은 사고에 의한 혼란이 있어서는 결국 포착할 수 없다.
명상의 축복은 사고에 뿌리내리고, 사고에 의해 반죽되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한 침묵 속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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