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슬픔, 죽음에 대한 탐구(3)
슬픔은 자기 연민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니 슬픔을 이해하려면 먼저 자기 연민을 가차없이 몽땅 잘라내야 한다.
예를 들어, 그대가 난 '외로워',라고 말할 때,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을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 관찰해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 순간 거기에 자기 연민이 있다면 그것은 슬픔이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자신이 토양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틜ジ?자기 연민을 열심히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고 다듬고 이런 저런 사상으로 덮어도, 그것은 여전히 거기 있다. 안에서 깊이 썩어 들어가면서.
그러니 슬픔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연민인 이 야만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사소한 일들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아프거나, 가까운 누군가가 죽었거나, 또는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해서 좌절하거나 침체되어 있거나 하면 자기 연민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원인이 뭐든 간에 자기 연민은 슬픔의 뿌리다. 일단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슬픔을 숭배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지않고, 거기에 고상하고 정신적인 의미를 부여하지않으면서, 이를테면 무슨 일이 있어도 신을 찾겠다는(이건 말 그대로 넌센스다) 말 따위는 하지 않고도 슬픔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우둔하고 어리석은 마음만이 슬픔을 참고 견딘다. 그러니 슬픔은 조금도 받아들여선 안 되며 부정해서도 안 된다. 자기연민에서 벗어날 때 그대는 모든 감상적인 생각과 자기연민에서 샘솟는 모든 감정 표출인 슬픔을 이미 버렸다. 그러면 완전한 주의를 기울여 슬픔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듣는 것을 그저 말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들은 그대로 실행해 보기 바란다. 슬픔, 변명 늘어놓기, 핑계, 자기 연민, 감상적인 생각, 슬픔을 대하는 감상적인 태도, 이런 것들을 우리는 멍하니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모두 에너지 낭비다. 슬픔을 이해하려면 그것에 온통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거기에는 변명이나 감상이나 합리화 따위가 끼어들 여지가 없고 자기 연민 따위도 끼어들 자리가 없다.
슬픔에 완전한 주의를 기울이라고 말할 때, 내 말이 분명하게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슬픔을 해결하거나 이해하려고 주의를 기울이는 게 아니다. 그저 바라보고 관찰하기만 하면 된다. 이해하고 합리화하려고 노력하거나 또는 슬픔으로부터 도먕치려고 애쓰면, 슬픔이라 불리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완전한 주의를 기울이는 소극적인 상태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슬픔을 없애기 위해 그것을 분석하지 않으며, 분석적으로 조사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하는 건 마음의 또 다른 속임수일 뿐이니까. 마음은 슬픔을 분석한 다음 슬픔을 이해했고 거기에서 벗어났다고 상상한다.(그건 넌센서이다) 슬픔 중의 어느 한 가지를 없앨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슬픔은 또 다른 모습으로 찾아올 거이다. 우리는 전체적인 것으로서의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대의 슬픔이건 나의 슬픔이건 다른 어떤 슬픔이건 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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