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단 하나의 생각일지라도 그것이 자아의 본질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K: 예, 저는 '예'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생각이 두려움이고, 생각이 기쁨이며, 생각이 슬픔입니다.
그러니 생각은 사랑이 아니지요. 생각은 자비가 아닙니다.
생각이 지어낸 이미지가 '나'입니다. '나'라는 것은 이미지일 뿐입니다.
이미지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이미지가 나입니다.
자, 지금 나인 이미지를 제가 관찰합니다.
'열반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제가 탐욕스럽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돈을 원하는 대신에 다른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탐욕이지요. 그래서 탐욕을 조사합니다. 과연 무엇이 탐욕입니까?
'더 많은 것'? 그것은 지금의 제가 더 많은 것, 더 큰 것으로 바뀌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탐욕이지요.
그래서 '내가 왜 이런 식인가?', '왜 더 많은 것을 원한다는 말인가?' 하고 말합니다.
그것은 전통입니까, 습관입니까? 그것은 두뇌의 기계적인 반응일까요?
저는 지금 알아내려 하고 있습니다.
단번에 알아낼 수도 있겠고, 차츰차츰 알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번에 알아낼 수 있으려면, 아무런 동기가 없어야 합니다.
동기라는 것이 왜곡시키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선생 자신을 알아내는 것은 엄청나게 재미 있는 일입니다. 선생이 바로 우주이기 때문이지요.
이론적으로 우주라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우주라는 뜻입니다.
저는 지금 스스로를 알아내려고 합니다.
만약 스스로를 모른다면, 무슨 말을 하든 의미가 없고, 그것은 타락이기 때문입니다.
말로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타락이라는 것을 실제로 이해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저의 행동은 타락된 행동이고, 따라서 그런 타락된 삶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알아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알아내기 위해서 저는 관찰합니다.
선생과의 관계를, 제 아내와의 관계를, 제 남편과의 관계를 관찰합니다.
섹스를 원하기 때문에, 저를 편안하게 해주기를 원하기 때문에,
애기들을 돌보아 주기 때문에, 요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녀에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녀와의 관계를 관찰한 결과로, 쾌락의 원칙, 집착의 원칙, 안락의 원칙 등 등을 발견합니다.
이때 과거의 개입 없이, 그 어떤 결론도 없이 관찰하는 것일까요? 그 관찰이 정확할까요?
'자기 스스로에게 빛이 되라'고 하는 순간,
기타(Gita)나 구루들이나 아쉬람들의 권위를 포함한, 모든 권위들이 사라집니다.
그 문제는 그 자체로서 지극히 재미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빛이 된다면 정치, 경제, 사회적인 관계들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들은 이러한 의문을 가지지 않습니다.
자기가 스스로에게 빛이 되어서 계속 나아가 보십시오, 끝까지 나아가 보십시오.
자신이 자기 스스로에게 빛이 되어서 말씀입니다. 저는 그 점을 분명히 보고 있습니다.
저에게 그 어떤 권위도, 그 어떤 안내자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권위에 대하여, 구루의 폭정에 대하여,
아쉬람의 독재에 대하여, 과연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자기 스스로에게 빛이 된다는 것은 전체적으로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전체적이지 못한 그 어떤 것도 모두 다 타락입니다.
전체적인 사람은 타락과는 관계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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