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무르티(K)/단정님 글

seeing is acting.

그러한 2008. 4. 25. 14:36

 

seeing is acting.

 

크리슈나무르티님의 글을 공부하면서

누구나 한번쯤 가장 많은 고민을 할애하게 되는 구절이 

저는 이 부분일 꺼라고 생각합니다.

 

 보는 것이 곧 행동이다.

 

결국이 그 한 방이 되지 않아서 많은 분들이 그렇게 허당나게 고민하다가

포기했거나...인생을 종쳤다고 보고 있습니다.

 

제가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동안

소위 나름대로 공부라면 공부, 수행이라면 수행라는 것을 했지만,

그동안 크게 간과했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하나는 seeing is acting 이였고,

또 하나는' 있는 그대로 보라' 라는 의미였습니다.

 

아마도 님들이 이 쪽 공부를 하게 되면서 필연적으로 가장 들어보신 말씀이

있는 그대로 보라 라는 말일겁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욕구(생각의 움직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관찰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욕구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과 욕구에 계속 휘말리고 있는 것은 다른거죠.

 

욕구에 계속 말리고 있는 것은 욕구를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 보면,

말그대로 seeing is acting이 된다면

욕구(생각, 환상,자아)를 seeing 한다면 그것은 즉각적인 acting이 되어야하는 거죠.

 

그러니 욕구에대해 seeing is acting 이 된다는 것의 의미는

저는 그것을 한마디로 ' 제어'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마치 물이 엎지러지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면

물이 엎지러지게 그냥 놔둘리가 없지 않습니까

물이 엎지러짐을 막음, 피함

즉, 물이 엎지지 않게 '제어' 하겠죠.

 

그 제어는 생각에 의한 억제, 억압이 아니라,

물이 엎지러지는 상황에대한,

위험에대한 즉각적인 대응이며

위험에대한 즉각적인 보호이며

위험에대한 즉각적인 제어이며

사실에대한 즉각적인 감응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위험을 위험으로 보고 있지 못하는 오류에 빠져 있는거죠.

그러면서 자신은 있는그대로 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겁니다.

 

그러니 위험에대한 올바른 인식이라면,

정말로 실제로 있는그대로 보고 있다면

seeing is acting 이라면.....그 위험에대한 즉각적인 대응, 즉 제어가 있어야하는 거라고 봅니다.

 

그 제어력이 없다면... 그것은 거꾸로 있는 그대로...실제로 보고 있지 못하는 결론이죠.

 

그럼 문제는 누가 제어하는가.........인데요,

 

누가 제어할까요

위험이라고 느끼는 그 스스로가 제어하는거죠.

즉, 자제죠.

 

문제는 위험으로 위험, 사실 스스로가 못 느끼는 거죠.

그러니 자제가 안 되는 거죠.

그저 ' 이건 그저 생각이며 환상이고 위험이야, 그러니,  있는 그대로 봐야만 해.'

라고 생각이 제어를 하려고 하는 거죠.

 

사실 그 자체가 스스로 제어를 하는 것, 자제가 안 되고,

생각이 사실을 간섭하면서 제어하려는, 보려는...등등의 헛된 노력이 반복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 자신이 무언가에대해 '질투'를 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것에대한 실제적인 대응이라면,

그 질투에대한 스스로의 제어력은 질투의 허위에대한 스스로에게 위험을 인식시켜 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질투가 사랑이라고 우기거나

질투는 '나쁘다'라는 억압, 생각으로 넘어가게 되는 거죠.

억압은 제어가 아닙니다.

이미 그 질투에대해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빠져나가버린거죠.

억압이란 방식으로 빠져나가버린겁니다.

 

그 제어가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뭘까요

그건  '앎'이죠.

 

위험에대한 실제적인 자각 말예요.

생각으로 아는 게 아니라, 실제로 아는 앎.

그리고 그 앎이 실제라면 생각의 위험에대해 스스로 제어를 할 수 있는 거구요.

 

그러니... 있는 그대로를 보는 문제에대해서

자신이 그 허위, 환상, 욕구, 생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문제에대해서

즉각적인 대응= 제어가 없다면 자신이 보고 있다, 관찰하고 있다는 미명 아래

분명히 어딘가로 빠져나가버렸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봅니다.

 

그 빠져나감은 도피, 정당화, 억압....등등 굉장히 여러가지가 있겠구요.

 

그러니, 제 생각에 수행에 처음이자 마지막의 관건은

오직 '제어' , 자제라고 봅니다.

 

자신의 마음에대한 완전한 '제어'는 곧 완전한 '주의'를 의미한다고 봐요.

부주의에대한 관찰,

생각에대한 관찰,

위험에대한 관찰....

그 모든 것은 곧 acting, 위험에대한 즉각적 대응, 즉 제어로 연결되어야한다고 봅니다.

 

그러니...거꾸로 왜 '제어'가 되지 않는지..어떻게 교묘하게 빠져 나가고 있는지에대한 문제를

좀 더 연구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합니다.

 

생각의 끝을 보면 acting이 되는 게 아니라 acting 곧 끝이라는 거죠.

 

 

수행이라는 것, 마음 공부라는 것을 하다보면

삶이 참으로 무미건조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살려고...수행, 진리, 마음에대해 공부하려했던가...싶어집니다.

 

그러나,

일반인이 욕구, 욕망에 기대어 즐거움을 찾는다면

수행자는 욕구, 욕망의 위험에대한 제어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거라고 봅니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첫번째 즐거움도........ 마지막 즐거움도 전 '제어'라고 봅니다.

생각, 자아, 환상, 그 위험에대한 완전한 제어는

곧 완전한 주의를 의미하며 완전한 사랑을 뜻한다고 봅니다.

 

자신의 마음이면서도 자신 맘대로 하지 못하는 그 마음에대해서

완전한 제어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물론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은 없는거죠.

없다는 그것, 그 환상, 그 위험을 보지 못해

그 마음에대한 완전한 제어력을 갖지 못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그 허위에대한 완전한 간파력, 그리고 그것에대한 통찰력,

그리고 그로인한 허위의 위험, 그 위험에대한 완전한 대응, 제어력이라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요

 

그건 곧 완전한 자제가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는 상당히 아이러니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른바 '자유자재' 해지는 거죠.

 

욕구에...생각에...그 조건에 더 이상 휘말리지 않는 자유,

그 사랑...그 즐거움...그 행복....

 

수행자에게 있어서 처음이자 마지막까지 얻는 즐거움이 '제어, 자제'의 즐거움이라면

가장 큰 즐거움은 그 모든 것을 알았을때의 지혜, 통찰의 즐거움인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