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息]/밑줄 긋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계이다

그러한 2008. 4. 29. 14:26

 

성자 혹은 이상적인 올바른 사람은 생계 너머에 있다. 사실 성자는 생계 그 자체이다.
우리가 모든 세계에서 더욱 유용하고 생태적으로 기능적이 되면 될수록
우리는 더욱 우리 자신의 생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공급'의 과정에서 모든 것은 정확한 양으로 정확한 시간에 우리에게 온다.
허나 이는 "선하라, 그러면 모든 것은 보장되리라."와 같은 수동적 입장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선한은 이론적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시장 안에 존재하는 따라야 하는 행로이다.
이것은 선한 협상자, 정직함, 그리고 타인, 또는 다른 살아 있는 존재, 우주와의 거래에서
약탈자가 아님을 의미한다.
생계는 환경과 조화롭게 사는 사람, 사업거래를 통하여 자신을 신성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단지 하나의 변수일 뿐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생계를 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계가 자신의 목적(지원하는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들을 찾는다.

이것은 믿음을 단순화시키려는 시도가 아니다.
삶의 다양한 순간마다 하나의 통찰력이 우리 모두에게 열린다.
행복은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생계로 변형시킬 때, 우리가 생계가 될 때이다.
우리는 한때 이것을 경험하였다.

비록 생계를 위한 엄청난 잠재성을 가졌던 낭만적인 사춘기 동안이었을지라도,

우리 모두는 특별한 것을 경험하였다.
고용된 근로자가 아닌 예술가는 내가 이야기하는 바를 알고 있다.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이 자신을 절대자의 한 부분이 되게 만들고
자신을 세계와 신비한 관계로 끌어들임을 이해한다.
이러한 종류의 생계는 단순한 생존 너머이며 건강의 운반체이며
우주를 풍부하게 하여 이 우주에 기여한다.

우리가 생계가 되는 이러한 순간은 변하기 쉽고 그 순간은 오고 간다.
그러나 그 순간을 통하여 우리는 운명의 수레바퀴를 언뜻 훔쳐볼 수 있다.
그 순간이 올 때 우리는 올라가고 그 순간이 갈 때 우리는 떨어진다.
우리는 떨어지는 경험을 새로운 상승에 대한 신념 위에 둔다.
하강은 다시 상승에 공헌하는 인간의 조건이다.
우리 생계의 많은 것은 우리의 상승과 하강의 기억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확신은 생계의 순환성과 모든 세계들의 상호작용성을 이해할 때 온다.
우리가 때때로 느끼는 절망은 상승과 하락이 선명하게 선(線)적인 것으로 다가올 때이다.
수레바퀴의 회전을 역회전하여 꼭대기에 돌아가려고 시도하는 것은 하강을 연장하는 것이다.

필사적으로 우물의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을 거절하는 사람들은
작은 상승의 승리 속에 끝없는 떨어짐을 야기한다.
신이 이러한 사람들과 이와 같이 행동하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아시야의 세계(물질계), 즉 구체적인 세계는 이러한 것이다.
왜 우리가 이 세계에서 떨어져야 하는가?
하락(떨어짐)은 다시 상승하는데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 <탈무드로 부터 배우는 돈의 지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