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 사람이 관찰자를 관찰할 수 있습니까?
K: 지금 그 문제에 다가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관찰자를 관찰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Par: 관찰자라는 것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기는 하지만, 관찰자 자체를 관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K: 예, 그렇지요. 관찰자 자체를 관찰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실제로 '있는 것'과, 관찰자가 끼여들 때에만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관찰자를 인식한다고 말합니다. 그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좀 더 천천히 나아가도록 해봅시다. 하나의 예로서 질투라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관찰자가 끼여들어서는 말합니다. '과거에 나는 질투를 했었다. 나는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라고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질투를 인식합니다. 그 '나'가 바로 관찰자입니다. 사람은 관찰자 그 자체를 바로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관찰되는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관찰자의 관찰이 있을 수 있습니다. 관찰자가 관찰에 관심을 가지면, 그때는 관찰자에 대한 알아챔이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관찰자 그 자체를 바로 관찰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단지 그 어떤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이, 관찰자를 관찰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명백한 사실입니다. 질투의 감정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는, 관찰자도 없고 관찰 대상도 없습니다. 다만 그러한 상태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곧바로 관찰자가 끼여들어서, 그것이 질투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그는 그것에서 달아나거나, 억눌러 버리거나,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거나, 또는 그것으로부터 도피해 버립니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관찰자가 어떤 것과의 관계 속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FW: 관찰자가 끼여드는 순간에, 관찰자를 관찰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까?
K: 예, 그게 바로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폭력적이거나 화를 냅니다. 폭력의 그 순간에는 거기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관찰자로서의 선생도 없고, 관찰되는 대상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단지 폭력의 상태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생각의 움직임인 관찰자가 끼여들게 됩니다. 그런데 생각은 과거입니다. 새로운 생각이란 결코 없습니다. 그 생각의 움직임이, 지금 여기의 현재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 방해꾼이 바로 관찰자이며, 그런 방해를 통해서만이 관찰자를 탐구할 수 있습니다. 그는 폭력의 비이성적인 것으로부터, 그것을 정당화하는 따위로 도피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또한 현재에 대하여 접근하는, 극히 전통적인 방법입니다.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진 그 접근 방법 자체가 바로 관찰자인 것입니다.
P: 그러므로 어떤 의미로는 오로지 지금 여기의 현재에서 도피함으로써만이, 관찰자는 자신을 확립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K: 도피 또는 합리화함으로써.
D: 또는 지금 여기의 현재를 방해함으로써.
K: 지금 여기의 이 현재를, 그 어떤 형태로 방해하든지 간에, 그것은 모두 관찰자의 행위입니다. 이 말을 말로서만 받아들이지 마세요. 제발, 말에서 그치지 말고 실제로 발견하도록 해보세요.
-통찰력으로의 탐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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