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 1일(금) : 바멘다로
- 아침에 비, 바멘다(
먼 길을 가야 하므로 일찍 일어나서 씻으려고 하니, 오늘은 아예 물이 나오지 않는다. 핑계 김에 세수를 하지 않는 건 그렇다 쳐도, 양치질을 하지 못 하는 건 영 개운치 않다. 오늘은 하루 내내 차를 타고 길에서 보내야 할 것 같은데, 새삼 어제 저녁 지불한 숙박비도 비싸다는 생각이 든다.
세수도 못하는 김에 일찍 차편이나 알아보자고 정류장으로 나갔더니, 마침 쿰바로 가는 버스에 마지막 한 자리가 비어있다. 차장에게 기다리라고 신신당부하고는 부리나케 짐을 챙겨 나와서 차에 올랐다. 비는 내리고 마치 전투에서 후퇴하는 상황이지만 하루 일진은 그리 나쁜 것 같지않다. 자리를 잡고 출발하기만을 기다리며 앉아 있자니, 앞 창에 성경에서 인용한 것인지 경구가 붙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Relax! Every problem has an expiring date." 그런 희망이 인간을 날마다 일어서게 하는 힘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어젯밤 느꼈던 절망감이 사라지는 듯 하다. 역시 인간의 감정은 약하고도 간사하다. 단어 몇 개로 기분이 이렇게 바뀌니 말이다.
차장이 모든 승객이 다 탔는지 일일이 호명하면서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 후에 드디어 출발이다. 어제 들어 올 때부터 도로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비 온 뒤라서 더 나빠진 것 같다. 창 밖으로, 수렁에 빠진 차를 승객들이 밀어서 끌어내는 다른 차의 모습을 보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조금씩 나갔다.
우리 차에는 그런 불행이 닥치지 않아서 중간에 승객을 태우는 곳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다른 승객들을 태우고도, 경찰로 보이는 남자가 자신의 짐을 싣기 위해서 오래 기다리게 해서 또 얼마간 지체되었다. 그 사이에 승객들은 내려서 아침 요기를 하는 시간으로 활용하는 지혜(!)를 보여준다. 도로 옆으로는 음식을 조리해와서 냄비 채로 열어 두고 파는 가판들이 즐비하다. Bush Meat라고 부르는데 아마 원숭이, 족제비 등을 요리한 것으로 보인다. 어린아이들도 맛있게 먹는 걸 보니 내 배도 절로 불러 오는 느낌이다. 사람 사는 세상이니 먹지 못할 것도 없지만 억지로 먹어야 할 상황도 아니니 만큼, 나는 구경만 하다가 작은 비스켓 2봉지를 사서 차에 올랐다.
비는 벌써 그쳐 있다. 차는 같이 타고 있던 우체국 직원의 업무 - 우편물 전달 - 를 위해서 잠시 정차하기도 하면서도 계속 달려,
한 대 밖에 없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바멘다행 버스에 올랐다. 예닐곱 시간 걸린다는데 언제 떠날지는 알 수 없다. 소요시간에 비해 요금은 3,000세파로 저렴한 편이다. 오늘 중으로는 떠나겠지 하는 심정으로 기다리며 점심끼니로 삶은 계란 3개를 샀다.
승객들 간에 벌어진 몇 차례의 자리다툼을 지켜보고 새로 기름을 채우는 등, 두시간 반을 기다려서 드디어 출발하게 되었다. 정말이지 카메룬 여행을 잘하는 최선의 방책은 끝까지 기다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로 옆 자리에 앉은 씩씩한(!) 아주머니가 쉴 새 없이 다른 승객들과 토론하는 바람에 귀가 따가울 정도이다. 현지인들은 대체로 활달하고 외향적인 면에서 편하게 느껴진다. 중간에는 차창을 통해서 산 멍키콜라Monkey Kola를 나누어 주는 친절을 보여 주기도 했다. 흰색의 과육에서 단맛이 나는 일종의 견과류인데, 두꺼운 외피는 버리고 씨를 감싸고 있는 별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부분을 먹는다는 것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건지도 모르겠다.
도로는 포장되어 있고 주위경관도 좋아서 승객들로 빼곡히 들어찬 승합버스를 타고 가는 것이 그리 힘들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졌는데, 이번에는 자주 정차하는 것이 문제였다. 도로에서 경찰의 검문은 자주 있는 일인데 보통은 형식적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구간은 유난히 검문이 잦고 승객 하나 하나의 신분증을 확인하는 등 분위기가 좀 달랐다. 지금처럼 카메룬이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기 전까지는 영국과 프랑스 통치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이 지역은 영국 통치지역 – Anglophonie – 이었고, 현재도 상대적인 비주류 지역으로 인식되어 있는 점이 이런 차별을 받는 원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승객들의 반응 또한 그러했다.
몇 번의 검문을 거치는 과정에서 승객 중의 한 아가씨가 신분증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다소 오랜 시간을 정차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승객들은 경찰이 돈을 원하기 때문에 저렇게 시비를 거는 것이라는 측과 그 승객에 대해서 원성이 퍼붓는 측으로 나누어졌다. 결국 그 승객이 경찰의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 일부러, 동승한 듯한 다른 승객의 울고 있는 아기를 안고 가서 사정하는 촌극(!)을 연출하고 나서야 겨우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 경찰의 검문이 승객들의 편의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어서, 어쩌면 이런 면이 이 나라의 더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씁쓸했다.
승객 중의 아주머니 두 사람을 내려주기 위해 차가 멈춰 섰다. 창을 통해서 뒷모습을 지켜보니, 친척인 듯한 마중 나온 다른 아주머니와 같이 노래를 부르고 어깨춤을 추며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특이하게 보인다. 심지어 짐은 길에 그냥 놓아두고 동네의 다른 사람들에게 바로 인사를 나누러 가는 듯 하다. 이런 인사는 부녀자들 사이에서만 나누는 것 같았는데, 길에 던져놓은 짐은 남자들이 나와서 길 옆에 있는 집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 지역 사람들의 전통적인 인사방법인지 모르겠는데, 보고 있는 나한테도 반가움이 그대로 전달되는 듯 하다.
길을 따라 위로 달리던 차가, 늦은 오후 시간이니 요기라도 하고 가라는 듯 또 멈춰 섰다. 소야를 하나 집었는데, 처음 하나 집어주는 것이 좀 작아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맛을 보이기 위해서 그냥 주는 것이라고 한다. 공짜라고 하니 마다할 필요가 없어 맛있게 먹고 나니까, 그걸 먹었으니 기본적으로 3개를 사야 한다고 주장한다. 황당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하나 더 먹고 2개에 대한 돈만 지불했다.
한 시간 가량 더 달려 바팡Bafang에 도착해서 승객 한 사람을 태우고 다시 출발했다. 돌아오는 길에 들를 예정이므로 지금은 그냥 지나친다. 차에 너무 오래 있다 보니 이제 바깥 풍경도, 승객들의 대화도 그저 건성이다. 더구나 날도 저물어 빨리 도착했으면 하는 마음 뿐인데 차가 또 멈췄다. 혹시 도착했나 싶었는데 이 곳은 바푸삼Bafoussam이라고 하고, 다시 승객 서너 명을 태워 빈 자리를 채운다. 승객들이 빈 병을 내밀며 물을 부탁하니까 주유소 직원이 수돗물을 담아 주기도 한다. 외국인들은 생수를 사먹거나 가정에 정수기를 두고 정수해서 먹거나 그도 아니면 반드시 끓인 물을 마시는데, 어려서부터 면역이 되어서인지 현지인들은 수돗물을 그냥 마시고도 별 탈이 없다. 여행 중에 물이 떨어지는 것 만큼 고생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다.
여러 차례 잠깐씩 멈춰 한두 명의 승객을 태운 버스가 멀리 불을 밝히고 있는 도시를 향하고 있다. 옆 자리의 아주머니가 바멘다라고 일러준다. 밤에 보는 것이라서 그런지 일단은 아름답게 보인다. 도시로 들어서는 진입로는 고개이고 그 아래 분지에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호텔 근처라면서 내려주는데 어디에도 불빛은 보이지 않는다. 날씨는 맑아서 밤하늘의 별이 유난히 반짝거린다. 잠시 서 있다가 지나가는 현지 주민의 안내를 받아서 약간 걸어 가니 그제서야 호텔이 보인다. 자그마한 방을 3,000세파를 지불해 짐을 부리고, 먹을 것을 부탁했다. 호텔에 식당이 없는데다
호텔은 작지만 깨끗하고 관리도 그런대로 되는 편인 것 같다. 직원이 무척 친절하고 작은 규모답지 않게 호텔로고가 새겨진 비누가 앙증스럽다. 몸이 피곤해서 씻지도 않고 그냥 잠에 빠져 들었다.
'[삶-食] > 새우의 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쿰보로 - 2 (0) | 2008.07.10 |
---|---|
2000년 9월 2일(토) : 쿰보로 - 1 (0) | 2008.07.10 |
맘페로 - 2 (0) | 2008.07.10 |
2000년 8월 31일(목) : 맘페로 - 1 (0) | 2008.07.10 |
2000년 8월 30일(수) : 쿰바로 (0) | 2008.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