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息]/밑줄 긋기

그리스인 조르바

그러한 2012. 1. 4. 13:45

 

 

나는 어느 날 아침에 본, 나무등걸에 붙어 있던 나비의 번데기를 떠올렸다.

나비는 번데기에다 구멍을 뚫고 나올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렸지만 오래 걸릴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입김으로 데워 주었다.

열심히 데워 준 덕분에 기적은 생명보다 빠른 속도로 내 눈앞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이 열리면서 나비가 천천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날개를 뒤로 접으며 구겨지는 그 날개를 펴려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나는 내 입김으로 나비를 도우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펴는 것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때늦은 다음이었다.

내 입김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를 날개가 쭈그러진 채 집을 나서게 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어 갔다.

 

나는 나비의 가녀린 시체만큼 내 양심을 무겁게 짓누른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러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바위 위에 앉아 새해 아침을 생각했다.

그 불쌍한 나비라도 내 앞에서 몸을 뒤척이며 내가 갈 길을 일러 준다면 참 좋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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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 보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

"조르바, 잘해 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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