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息]/빈자의 양식

그만큼

그러한 2015. 6. 23. 15:28

 

 

그만큼

 

- 문정영

 

 

비 그치고 돌멩이 들어내자

돌멩이 생김새만한 마른자리가 생긴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는 내 발 크기가 비어 있다.

내가 크다고 생각했는데 내 키는 다 젖었고

걸어온 자리만큼 말라가고 있다.

누가 나를 순하다 하나 그것은 거친 것들 다 젖은 후

마른 자국만 본 것이다.

후박나무 잎은 후박나무 잎만큼 젖고

양귀비꽃은 양귀비꽃만큼 젖어서 후생이 생겨난다.

여름비는 풍성하여 다 적실 것 같은데

누운 자리를 남긴다.

그것이 살아가는 자리이고

다시 살아도 꼭 그만큼은 빈다.

그 크기가 무덤보다 작아서 비에 젖어 파랗다.

더 크게 걸어도

더 많이 걸어도

꼭 그만큼이라는데

앞서 빠르게 걸어온 자리가

그대에게 먼저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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